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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2004 ] 아버지를 거부하는 칸

제 57회 칸영화제, 12명의 신인들 경쟁부문에 진입

해마다 5월이면 칸의 리비에라 해안과 크로와젯 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밝고 강렬한 햇살로 반짝거리게 마련이다. 올해로 57회를 맞는 칸영화제는 짙은 먹구름과 함께 시작됐다. 개막 일주일 전부터 파리의 하늘은 차갑게 뿌려대는 빗줄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개막날인 5월12일, 그 겨울빛 먹구름은 칸으로 이어졌고, 거꾸로 파리는 화창하게 갰다. 칸에 드리운 그림자는 날씨뿐이 아니었다. 개막 전날 <리베라시옹> 1면 톱 제목은 ‘비정규직, 기수를 칸으로’, 소제목은 ‘칸영화제, 황색 신호등 켜지다’였다. 지난해 아비뇽연극제 개최를 무산시켰고, 지난 4월에는 몰리에르시상식을 무산시켰던 공연예술 분야 비정규직 노조가 일찌감치 칸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칸영화제 점령위원회 창립 선언문’까지 내놨다.

비정규직 노조와 함께 개막식을 열다

개막식에서 공연예술분야 비정규직 대표들이 등에 ‘협상’이라는 글자를 붙이고 시위입장하고 있다.

“문화, 건강, 교육 등 공적 재산을 축소하려는 우파 정부의 긴축 움직임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막아야 한다.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세계 제일의 영화제이자 올림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미디어가 몰리는 칸영화제는 문화에 대한 생각을 지키려는 우리의 결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모두 칸으로 오라.”

아녜스 자우이, 장 뤽 고다르 등 칸 공식부문에 초청된 프랑스의 일부 감독들이 정부의 실업수당 감축안에 반발하는 비정규직 노조를 지지하며 ‘협상’을 공개적으로 종용했다. 개막 전날, 칸의 상인들은 영화제가 무사히 열려야 한다며 노조에 대항하는, 상업적 목적이 분명한 시위를 벌였다. 개막 당일,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팔레 데 페스티발 건물을 드나드는 모든 기자들의 몸과 가방은 테러에 대비해 매번 수색당해야 했고(지금도 여전히), 골목골목에는 ‘완전무장’한 경찰들로 빼곡했다. 개막식 생중계를 맡은 <카날 플뤼>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체 프로그램을 마련해놓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칸은 도전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며, 장르적인 동시에 정치적인(좀더 분명히 말하면 좌파적인) 쪽을 택했다. 우선, 칸은 비정규직 노조의 대표들에게 레드 카펫을 당당히 밟으며 자신들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협상’이란 영어 단어를 등에 새겨넣은 그들은 개막식장에서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종 관심사인 영화는? 칸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위를 거부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수십년간 칸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질 자콥 집행위원장의 영향력은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던 지난해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분위기다. 그를 대신해 전면에 나선 이는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 프레모는 올해 프로그램의 특징을 “확인과 발견”이라고 균형어린 발언을 했지만 의중은 명백히 후자쪽에 있다. 그는 9명의 감독이 처음으로 칸 공식부문에 초청됐고, 무려 12명의 감독이 처음으로 경쟁부문에 진입했다는 걸 변화의 증거로 내세웠다. 경쟁부문에 애니메이션 두편, 다큐멘터리 세편을 넣은 것도 처음이다. 또 경쟁부문에서 프랑스영화가 5편이나 들어섰던 지난해에 비해 3편으로 줄여놓은 것, 스페인영화를 처음으로 개막작으로 선정해 할리우드 스타가 단 한명도 없는 ‘썰렁한’ 개막식을 연출한 것조차 자랑했다. 프레모는 심사위원단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올해부터 모든 상을 각기 다른 영화에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반드시 준수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지난해에는 <엘리펀트>가 황금종려와 감독상을 한꺼번에 차지했다).

질 자콥 노선의 쇠퇴

개막작인 <나쁜 교육>의 알모도바르 감독과 배우 등 입장.

프레모의 선택에 대한 보증은 아시아, 특히 한국이 책임져야 할 판이다. 질문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프랑스 합작의 문화채널 <아르테>는 “아시아에 영화의 미래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그를 ‘추궁’했다. “칸은 일종의 사진이다. 그 시점에서 세계 영화의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마침 올해 우리가 본 것은 한국, 일본, 중국, 타이이고(언급한 국가의 순서가 이랬다), 다른 켠에 남미영화가 있다.” 영화제 기간 동안 24시간 방송을 책임진 <칸페스티벌 TV>는 “경쟁부문 영화가 특정 국가에 치우쳐 있지는 않은가”라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 한국의 예를 들어보자. 홍상수는 미묘한 대상을 비주류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들었다. 한편 박찬욱의 영화는 극적이고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올드보이>는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쨌든 이 둘은 같은 나라에서 왔지만 서로 다른 영화다.”

5월13일치 <르몽드>의 칸 특별판 1면 제목은 ‘새로운 피-거장들의 뜰에 들어온 신인들’이었고, 여기서 경쟁부문에 진출한 두명의 감독만을 언급했다. 홍상수와 아르헨티나의 루클레시아 마르텔.

이게 과연 우연일까. 칸의 공식부문에서 선보인 개막작과 첫 번째 경쟁작은 작품선정의 주체가 다른, 비공식 부문의 감독 주간과 비평가 주간의 개막작들과 절묘하게 대비됐다. 아버지 없는 영화들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영화들로.

아버지를 거부하는 혹은 아버지가 없는 영화들

개막작 <나쁜 교육>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로 신부(Father)로 상징되는 아버지 세대에 대해 충격적으로 반기를 든다. 가톨릭 학교를 다녔던 소년은 자신의 아름다운 노래와 앳된 자태에 매혹된 신부로 인해 기괴한 성장기를 거쳐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게 된다. 장르로 따지면 필름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유머 섞인 혼합이지만 알모도바르의 스크린은 <키카> 시절처럼 그로테스크한 장면들로 수놓아진다. 알모도바르는 어린 시절 성당 합창단에서 솔로로 자주 노래했고 그의 노래를 좋아했던 신부가 솔로곡을 녹음해 성당 스피커로 끊임없이 틀어놓았다고 했는데, 이 경험이 영화 초반부에 그대로 담겨 있다. 알모도바르는 기자회견에서 “이 영화는 종교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며, 난 반가톨릭이 아니다. 어린 시절에 이미 신앙을 버리기는 했으나 종교의식과 종교의 여러 상징적인 도구에 매혹돼 있었다”고 했지만 “영화 속에서 종교가 아이들을 빨아먹는 뱀파이어처럼 보여지기를 바랐다”고도 말했다.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디스턴스>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뚜렷한 ‘발전’을 보여준다. 경쟁작으로 첫선을 보인 <아무도 모른다>는 히로카즈가 15년 동안 제작을 기다려왔던 작품으로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다. 각기 다른 아버지를 둔 4명의 어린 남매가 도쿄의 한 아파트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죽어가는 이야기다. 젊은 엄마는 어느 날 “또 결혼하고픈 사랑에 빠졌다”며 12살 소년 아키라에게 동생들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약간의 돈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아이는 엄마에게 이기적이라고 항의해보지만 “너의 아버지가 정말 이기적이야”라는 반박할 수 없는 대꾸를 들을 뿐이다. 4명의 아버지들은 애초부터 부재하는 인물들이었고,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신조를 지닌 엄마를 미워할 수도 없는 이들 남매는 자기들만의 ‘공화국’을 만들어간다. 좁은 아파트에 몰래, 그러나 즐겁게 숨어살지만 문제는 돈이다. 그들은 1년여를 버티지만 결국 카메라는 그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런 전망도 하지않고 눈을 감는다. 그들의 공화국은 실패한 듯 보이지만 그들 밖에 존재하는 학교와 가정이 우월하지 않다는 게 이 영화의 명백한 시선이다.

이에 반해 같은 일본산이지만 감독 주간 개막작인 이시이 가쓰히토의 <차의 맛>은 <아무도 모른다>와 대척점에 선 영화다(<차의 맛>이 지닌 영화적 재미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2시간23분의 시간이 꿈결처럼 지나간다). 할아버지,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삼촌,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은 각기 생동감 넘치는 독립된 개성을 자랑하지만 이들 가족을 궁극적으로 지탱시켜나가는 건 미쳤으나 예술가적 자질과 숨어 있는 애정으로 가득 찼던 ‘아버지의 아버지’다. 이 작품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켜주는 ‘아버지’ 없이 각기 다른 고민에 시달리는 가족들 사이의 유대는 불가능해 보인다. 비평가 주간 개막작 <안데스마스씨의 오후> 역시 아버지에 대한 영화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안데스마스는 풍광 좋은 곳에 딸을 위한 집을 지으려 한다. 건축가와 만나기로 했지만 정작 그를 찾아오는 건 건축가의 딸과 아내다. 건축가의 아내는 안데스마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딸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알려주지만 아버지의 무한한 애정은 변치 않는다. 미셸 포르트 감독은 마그리트 뒤라스의 조감독 출신이다.

‘세계의 가장(家長)’ 미국에 대한 거부 조너선 노시터 감독의 다큐멘타리 <몬도비노>가 칸영화제 개막 1시간 전에 황급하게 비경쟁 부문에서 경쟁부문으로 결정됐다. <몬도비노>는 전세계 와인산업의 글로벌화를 주창하며 나선 미국의 가족 기업 ‘몬다비’가 어떻게 세계 와인시장을 잠식하고 있으며 유럽의 전통적인 와인 문화를 어떤 식으로 파괴해가고 있는지를 북미, 남미, 유럽 3대륙을 넘나들며 보여주는 다큐멘타리다. 2시간40분의 상영시간이 3대륙 와인 산업 종사자들의 인터뷰로 채워져 있지만 다큐멘터리의 건조함을 뛰어넘는 유머와 위트가 가득하다. 티에리 프레모는 “이 영화를 비경쟁에서 경쟁부문으로 전환한 이유는 그저 이 영화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비경쟁 공식 상영작인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다큐멘타리 <살바도르 아옌데>와 경쟁부문에 출품된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처럼 <몬도비노>도 강한 어조로 미국을 비판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직접적으로 보이는 영화다. <몬도비노>에서 미국 와인 산업 관계자의 인터뷰가 나올 때마다 그 말도 안 되는 경박함과 문화적 천박함 때문에 기자들이 웃다가 넘어가는 상황들이 자주 있었다면 <살바도르 아옌데> 때는 눈물을 감추는 기자들이 상당수였다. <살바도르 아옌데>에는 아옌데를 없애기로 결정했던 닉슨의 사진과, 그를 보필하던 이의 인터뷰가 들어 있으며, <몬도비노>에는 레이건이 몬다비 회사의 와인잔을 들고 홍보하려고 찍은 사진이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또 ‘주목할 만한 시선’ 목록에는 숀 펜이 시나리오를 쓴 <리처드 닉슨의 암살>이 올라 있다. 이 작품은 9·11에 대한 암시로 가득하다. 닉슨을 없애기 위해 백악관으로 비행기를 몰아 자폭하려했던 한 가구중개상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다. 이쯤이면 <스크린 인터내셔널>이 데일리 1호에서 ‘정치가 칸을 납치하다’고 정색하며 1면 톱기사를 쓴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영화지상주의자 타란티노

칸영화제의 초반 풍경을 ‘아버지에 대한, 미국에 대한 반란’으로 묘사하는 건 과장이 아니지만 이것이 칸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장인 타란티노가 기자회견에서 “정치는 엿먹으라”(politics be damned)고 했던 발언은 그의 신념이다. 그는 <스튜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심사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오직 영화 자체, 영화에 대한 사랑뿐이다. 정부에 의해 암살을 당한 이란 감독이 만든 영화라든가 정치범으로 종신형을 살고 있는 칠레 감독의 영화라고 해서 상을 주는 건 있을 수 없다. 올해에 상을 받는 영화는 가장 훌륭한 영화일 것이다. 그래서 그 영화가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한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열두살인지 백열두살인지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전에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만약 이연걸 영화가 이란 감독이나 칠레 감독이 만든 영화보다 낫다면 나는 심사위원들이 거기에 상을 주기 바란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타란티노라는 존재 때문에 <올드보이>의 수상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측하는 한국 언론들의 분분한 움직임이 있으나 오히려 그의 존재 자체가 수상 가능성을 예견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여러 언론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오로지 ‘최고의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던지겠다는 것. 의중을 읽어낼 수 없는 이 수다꾼의 기준은 어떠한 영화적 경향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여론조사기관 메디아 메트리에서 보낸 하얀 치마의 아가씨들이 프레스센터 입구에 진을 치고 수시로 경쟁부문 리스트를 들고와서 설문조사를 해가곤 하지만, 그 설문지를 받아드는 순간 대부분의 기자들이 ‘잘 모르겠어요’라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끙끙댄다. 선택의 딜레마를 만들어내는 것은 예상치 못하게 ‘신인’들로 가득 찬 경쟁 출품작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타란티노라는 이름이 만들어내는 중압감이 아닐까.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 취향이 몹시 변한 건 아니다. 어떤 영화나, 어떤 감독들을 지겨워하게 된 건 사실이다. 이건 모든 시네필들이 진화과정에서 겪는 일이다. 처음에는 어떤 영화감독에게 중독되다시피하다가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스타일이나 그 사람의 세계에 대해서 피곤함을 느끼게 됐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말은 그 감독의 영화가 더이상 좋지 않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그 영화로부터 필요한 것을 다 뽑아냈다는 뜻 혹은 그 사람이 바뀌었다는 뜻, 혹은 이제 다른 방향을 추구할 때가 됐다는 뜻이다.”

그의 개막식 인사말은 “영화, 내 사랑”으로 시작해 “영화 만세”로 끝났다. 이제 프레모의 칸과 타란티노의 칸이 어떤 여정을 그려갈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개막 다음날부터 칸은 제 햇살을 되찾았다.

취재지원 장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