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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왈 펄프 누아르 “피도 눈물도 없이”
2001-10-26

“쾌감? 너나 즐겨…난 살아남아야 해”

지난 22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폐공장.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다찌마와 리>의 류승완 감독이 신작 <피도 눈물도 없이>를 밤샘 촬영중이다. 그런데 공포물도 아닌 액션영화의 촬영장이 꽤 괴기스럽다. 부도난 뒤 오래도록 방치된 공장 자체가 워낙 음산한데, 45m 크레인을 동원해 비를 뿌리고 `번개 라이트'로 이따금 벼락치는 효과를 내자 분위기가 딱 잡힌다. 폐차 직전의 차가 공장 안으로 질주한다. 전도연씨가 달려드는 차를 가까스로 피하지만, 차에 내려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이혜영씨까지 피하지는 못한다. “컷!”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나자 두 배우가 지친 표정으로 곧장 모니터 앞으로 다가와 방금 촬영한 분량을 유심히 살핀다. 그러더니 서로 말도 없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 물에 젖은 몸을 닦아내며 휴식을 취한다. 어딘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한 긴장감이 두 배우를 감싸고 돈다.

격한 액션이 줄곧 이어지는 영화의 특성이 적잖이 작용한 탓이다. 마치, 여성버디무비 <델마와 루이스>의 두 주인공이 <저수지의 개들>같은 험악한 분위기를 내려는 걸 상상해보라. 전도연씨는 손이 찢어지고 허벅지에 젓가락이 꽂히는 따위의 크고 작은 상처에 시달려왔다. “매번 영화를 새롭게 하는 것 같지만 그 어느 때보다 힘드네요. 맞는 장면이 많은데, 예전에는 액션 찍어도 크게 다칠 요소는 없었어요.”

모처럼 영화를 찍어서일까, 바싹 마른 이혜영씨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두려움이 없지 않지만 꾼처럼 보이려고 애쓰고 있어요. 거친 대사가 너무 힘들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봐야 할 정도로.”

도대체 어떤 영화냐고 묻자, 류승완 감독과 세번째 작업중인 김성제 프로듀서가 `펄프 누아르'라는 낯선 말을 꺼냈다. “밑바닥 인생의 두 여자가 투견장의 판돈이 든 돈가방을 훔치는 범죄물”이라며 “통속·원색적이란 느낌의 `펄프'란 말을 붙였듯 어두우나 칙칙하지 않은 액션 누아르”라고 한다. 폐선 내부의 투견장 장면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류 감독은, `펄프 누아르'가 김지운 감독이 시나리오 보고 붙여준 말인데 아주 맘에 든다고 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두 여성이 짝을 이룬 누아르라는 점이다. “남자 버디 영화는 많잖아요. 바비인형 같지 않더라도 충분히 멋있을 수 있다고 봐요. 액션은 예전과 많이 다를 겁니다. 액션의 쾌감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감정이 앞서도록 했어요.” 두 여자를 둘러싼 건 마초들의 세계다. 그래서 정재영, 류승범, 신구, 백일섭, 임원희씨 등 상당히 많은 남자배우들이 비중있게 등장한다. “군상 드라마이기도 해요.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인물들을 소품처럼 등장시키는 건 재미없잖아요. 30씬 이상 등장하는 인물이 15명 정도 돼요.”

초저예산 영화이지만 완성도가 높고 새로웠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6~70년대의 복고풍 액션으로 화제를 부른 <다찌마와 리> 등 류 감독 작품은 모두 액션물이다. 20억원이 넘는 `대작'을 처음 만드는 그가 액션누아르의 새로운 경지를 열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11월에 촬영을 끝내고 내년 1월말께 개봉할 예정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