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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견장 같은 세상 군상들의 이전투구
2002-02-25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된 류승완(29)씨의 두번째 장편 <피도 눈물도 없이>가 오는 3월1일 개봉한다. 이 영화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못지 않게 새로운 시도들을 선보인다. 여러 종류의 인간들의 개별적인 관계가 끝말잇기식으로 이어지다가 임자 없는 뭉칫돈이 생기자 그걸 정점으로 한데 얽히면서 이전투구를 벌인다. 그 과정에 배신과 보복이 난무하고 캐릭터마다 예기치 못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한다. 조직폭력배가 나오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를 한 덩어리로 취급하지 않고 구성원 각자의 동인을 따로 부여하는 방식은 지난해에 쏟아져 나온 조폭영화들의 계보에서 이 영화를 떼어놓게 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가이 리치의 영화가 연상되는 걸 피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영화에서 드문 시도임에는 분명하다.경선(이해영)은 40살 안팎의 여자 택시운전사다. 범죄 세계에 몸담았던 전력이 있고, 따로 사는 딸도 있다. 열심히 살아보려 하지만 칠성파로부터 빚 독촉에 시달린다. 수진(전도연)은 가수 지망생으로, 불법 투견장 사업으로 돈을 버는 전직 복서 독불(정재영)과 동거하지만 독불에게 매일같이 맞고 산다. 수진의 차가 경선의 택시를 받으면서 둘이 알게 된다. 김금복(신구)은 독불에게 정기적으로 상납받는 뒷골목 세계의 거물이다. 뭉칫돈을 마련하기 위해 독불과 짜고 투견장에 경찰이 들이닥치는 연극을 벌여 도박꾼들의 판돈을 쓸어가는 작전을 세운다. 이 사실을 안 수진이 돈을 가로채려고 경선을 끌어들인다.

이런 큰 얼개에 경찰과 칠성파, 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룸싸롱 웨이터 채민수(류승범)까지 끼어든다. 그래서 사건이 복잡하게 전개되지만, 류승완 감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야기를 잘 풀어놓는다. 인물들의 행동 방식도 설득력이 있다. 살벌한 폭력배들을 등쳐먹을 생각을 감히 해놓고 뒷감당을 못해 쩔쩔매는 수진에게 힘이 되는 건 그 영악함과 미련함의 불균형이다. 여자와 조직에 두루 배신당한 뒤에 악마구리처럼 살아남아 보복에 나서는 독불은 단순무식형 인간의 생존본능이 얼마나 강한지를 잘 드러낸다.그러나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조역이다. 점잖게 웃으면서 부하로 하여금 사람을 개패듯 패게 하는 김금복이 냉혈하면서도 이지적인 보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반면, 경선을 동정하는 온정주의자이면서도 조직 상부의 채근을 받자 얼굴을 바꿔 경선에게 주먹을 날리는 칠성파의 중간두목(백일섭)에게선 한물간 늙은 양아치의 비애가 읽히기도 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여러 인물에게 시점과 사건에 기여하는 비중을 골고루 주면서 인과관계를 재구성해간다는 점에서 타란티노의 길을 정통파로 걷고자 한다.그러나 캐릭터의 개성과 개연성이 논리적으로 유추는 되지만, 그 맛이 타란티노 영화 만큼 영화 안에 잘 녹아있지는 못하다. 사건의 설정 자체가 한국적인 느낌을 덜 준다는 것도 한 원인인 듯하다. 미국에서는 돈가방만 들고 튀면 숨을 데도 많고 외국으로 내빼기도 쉽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국에서는 돈을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도록 완전범죄를 기하든지 하는 쪽으로 사건이 다르게 전개되지 않을까. 신구와 백일섭씨의 연기는 이 이전투구의 무대가 한국이라고 느껴지게 하는 많지 않은 요소인데, 이 둘에게 더 많은 시선을 주지 않은 것도 아쉽다. 류승완 감독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보다 한층 세련된 액션과 동생 류승범씨가 벌이는 코믹한 연기로 영화에 자기 낙관을 찍는다. 타란티노식 이야기와 류승완식 액션의 만남이 첫 술에 포만감을 주지는 않지만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여전히 기대가 된다.임범 기자is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