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해외뉴스
정성일의 `마이너리티 칸 리포트`
2002-05-21

신인들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다수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에 대응하는 소수가 있게 마련이다. 필립 K. 딕 <마이너리티 리포트>상공 1만2500m 위에서의 보고서, 그 일편. 이건 작은 예고편이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그저 낄낄대며 읽으시면 된다. 영화들. 너무 많은 영화들. 2002년 칸에는 열하루 동안 204편의 영화가 찾아온다.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영화들의 명단. 그러니 이 영화들 중에서 놓치는 영화가 있더라도 나를 탓하지 마라. 올해 칸영화제에 찾아올 명단을 받아들자마자 나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대체 올해는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 거야?” 아마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물론 가장 먼저 발표된 심사위원장 데이비드 린치의 이름은 급소를 찔렀다. 그러나 그뒤를 이어 발표된 경쟁작들의 명단은 예정된 결과처럼 보였다. 이미 황금종려를 받은 마이크 리(<비밀과 거짓말>)와 다르덴 형제(<로제타>)가 다시 찾아온다. 그런데 왜 다시? 이스라엘의 아모스 기타이와 팔레스타인의 엘리 술레이만을 9·11 ‘이후’ 함께 부른 것은 물론 배려이다. 마뇰 드 올리베이라는 부문을 바꿔가면서 매년 찾아온다. 이번에는 다시 경쟁이다. 후배들의 기회를 위해서 다시는 경쟁에 오지 않겠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이름이 ‘민망하게도’ 경쟁에 다시 보인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켄 로치,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이클 윈터보텀은 황금종려를 잡을 때까지 기어이 다시 올 모양이다. 올 때마다 점점 추락과 스캔들을 경험한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이번에는 디지털로 만든 영화를 들고 온다. 물론 예상하지 않았던 이름도 있다. 다큐멘터리 <로저와 나>를 만든 마이클 무어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쓰기만 하면 무조건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는다”는 그의 자기 예언을 버린 1시간31분 길이의 ‘짧은’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를 가져온다.

지구상에서 내가 가장 먼저 본다, 흥분된다그러나 내 생각에 칸의 올해 비장의 카드는 지아장커의 <알려지지 않은 쾌락들>과 가스파 노에의 <거역할 수 없는>이다. 아직 어느 시사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두편. 게다가 가스파 노에의 영화는 ‘올해 온 모든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당신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대목이 있으므로 주의할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아, 그리고 물론 공식일정 마지막날에 상영될 임권택의 <취화선>. (어찌되었건) 영화제는 이상한 장소이다. 한편으로는 경기장이지만, 또한 복잡하게 뒤엉킨 사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미 범인은 밝혀진 상태이다. 문제는 그 사건이 결과만 있을 뿐이고, 도무지 그 과정을 종잡기 힘들다는 점이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영화제를 만찬에 비교하기도 한다. 어떤 해에는 중국요리가 중심에 놓이기도 하고, 어떤 해에는 매우 긴 코스가 이어지기도 한다. 또는 손을 들어준다고 해서 항상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지난해 나는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해졌다. 왜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와 차이밍량의 <거기는 지금 몇시입니까?>는 그저 거기 머물러야 하는가? 또는 자꾸만 영화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마침내 이런 기괴한 질문에 이르게 된다.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코언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것일까? 그러니까 영화제에 오면 누구나 선수이자 탐정이 된다. 이제부터 볼 영화의 어떤 영화 평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는 지금 보는 이 영화를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람을 이상하게 흥분시킨다. 그래서 그걸 누구보다도 빨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진다. 아무리 채워도 멈출 줄 모르는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의 갈증?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의 역사가 쓰여지고 있는 그 자리에 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두려워진다. 내가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또는 그 안에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것을 본 것은 아닐까? 나는 알고 있다. 1960년 칸에서 모든 사람들을 일제히 분개하게 만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가 심사위원 예술공헌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스미 시게히코는 탄식하였다. 영화제는 오즈의 영화를 발견할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영화제에서 사람들은 모두들 직감에 매달리고, 세상에서 위대한 직감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12년 전 모두들 칸에서 빔 벤더스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대신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소더버그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벤더스가 옳았다.

내 인생을 바꾼 <방랑의 결투>, 복원판을 만나다니!영화제는 그런 곳이다. 그러니까 2002년 칸에서 남들이 모두 보는 영화를 거절하고 내가 멋대로 영화를 선택한다고 해서 그걸 잘못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또는 데이비드 린치가 고른 영화를 내가 싫다고 해서 누가 맞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직도 지난해 황금종려는 <아들의 방> 대신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또는 지지난해 <어둠 속의 댄서> 대신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가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또는 그전 해…(라고 이 명단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중략).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경기장에 들어온 것이다. 또는 사건현장에 불려온 것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개의 서로 다른 세계를, 미래에 조금 먼저 막 도착한 SF소설의 주인공과 하드보일드 세상에 불려온 난처한 탐정 사이에서 자리를 번갈아 오가며 어느 쪽이 어느 쪽의 복제인지를 가늠하지 못하면서 질문할 것이다. 나는 역사가 쓰여지기 직전의 전미래 시제에 도착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 벌어지고 난 다음 아직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반과거의 시제에 찾아온 것인가? 나는 칸으로 가는 버스에서 김홍준 선배(영화감독,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상원 교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음, 정말 많다. 이 순서는 그냥 내 생각에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내 멋대로 붙여본 것이다)에게 이번 칸에서 기대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간단명쾌하게 대답했다. “두편. 하나는 가스파르 노에의 <거역할 수 없는>이고 다른 하나는 호금전의 <방랑의 결투>의 복원판.” 아아, <방랑의 결투>, (아직은 그렇게 불리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어린 꼬마의 인생을 바꿔놓은 한편의 영화. 그건 나만이 아니라 내 세대 수많은 영화소년들의 인생을 영화관으로 이끌었다(그런데 이 영화를 영화소녀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그걸 올해 칸에서 다시 만난다. 홍콩에서 서울로, 그리고 다시 칸으로. 그렇게 38년을 가로지르는 추억. 공항에서 전양준 선배(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와 김지석(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씨를 만났다. 같은 질문을 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김지석씨를 돌아보며 “이번 칸에서는 영국에서 큰 상이 하나 나올 것 같다고 하던데, 윈터보텀이야 그냥 온 거구 켄 로치는 요즘 아니지 않나? 그러면 머, 역시 마이크 리”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심지어 올해 칸은 영국영화의 해라는 말도 있다. 22편이 올라온 경쟁 부문에 세편의 영화인 마이크 리의 <전부 아니면 꽝>, 켄 로치의 <달콤한 16>, 마이클 윈터보텀의 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시선에 프란체스카 조셉의 데뷔작 <내일, 라 스카라!>가 황금카메라 경쟁후보로 선정되었다(박진표의 <죽아도 좋아>는 비평가주간에 황금카메라 경쟁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린 램지의 <모번 칼라>와 세인 미도의 <옛날 옛적 미드랜드에서>가 감독주간에 초청되었다. 공항에서 산 <카이에 뒤 시네마>의 표지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이고, 그 아래 아모스 기타이의 이름이 보였다. 장 마르크 랄란느는 좀 도발적인 서문을 붙였다. 1981년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자 <철의 남자>를 만든 안제이 바이다가 ‘최초의 사회주의 황금종려’를 받았다. 95년 시라크가 대통령이 되자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가 거부하는 자세로 감독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올해 대통령선거에 대한 칸의 대답은 무엇인가, 라고 물었다. 나는 무얼 기대하는가?나는 칸에서 무얼 기대하는가? 그건 (황금카메라를 놓고 서로 경쟁하게 될) 19편의 신인 감독들과의 만남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영화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그걸 나는 당신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또는 해변에 찾아올 자크 타티의 <플레이 타임> 70mm 복원판이다. 그리고 다시 고다르의 신작. 또는 나의 귀여운 친구 지아장커의 세 번째 영화. 나는 그 명단을 쓰다가 비행기에서 잠들었다. 나는 꿈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당신일지도 모른다(아직 앤더턴은 세 번째 리포트를 읽지 못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시는 분은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읽어보실 것. 이번 칸영화제에 관한 나의 주제는 필립 K. 딕이다. *^^* 다음주에 계속).칸= 정성일/ 영화평론가[사진설명] 차례대로 <케드미> <전부 아니면 꽝> <볼링 포 컬럼바인> <피아니스트> <스파이더> <거역할 수 없는> <알려지지 않은 쾌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