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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시작! 하고 돌아보지 않는다, 쉼 없는 직진 ‘시민덕희’
이유채 2024-01-25

보이스 피싱으로 전 재산을 날렸다는 사실에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린 뒤 할 수 있는 말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려달라는 구조 요청? <시민덕희>의 덕희(라미란)는 바닥에 누운 채 이렇게 입을 뗀다. “이 개새끼… 어떻게 잡아요?” 이 한마디로 스타트를 끊은 <시민덕희>는 평범한 시민이 보이스 피싱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를 제 손으로 잡는 데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직진한다. 영화가 거듭 쏘아올리는 피해자들의 상처를 감싸는 대사는 덕희와 함께 내달리던 관객의 귀에 콕 박혀 잠시 그들을 멈추게 한다.

<시민덕희>는 2016년 경찰이 국제 보이스 피싱 조직의 총책을 검거하는 데 거의 모든 역할을 한 중년 여성 김성자씨의 실화를 모티브로 하되 주인공이 직접 해외로 날아가 마무리한다는 설정을 붙여 규모를 키웠다. “자기 양심에 따라 용기 있게 행동하는” 실존 인물에 이끌린 박영주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고 “믿기지 않는 실화와 더없이 현실적인 허구에 감탄한” 라미란 배우가 주인공 덕희 역할을 맡았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어려운 환경에서도 무사히 촬영을 마치고 적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1월24일 개봉하는 <시민덕희>에 관한 리뷰를 전한다. 그리고 2019년 장편 데뷔작 <선희와 슬기> 이후 처음으로 상업영화에 도전한 박영주 감독과 “보이스 피싱 범죄 근절 홍보대사의 마음”으로 진중히 연기에 임한 라미란 배우와의 인터뷰를 뒤이어 잇는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 덕희는 집은 불타고 홀로 키우는 어린 자식들의 놀이방 비용마저 밀린 처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이스 피싱까지 당했다. ‘손 대리’라는 은행원에게 괜찮은 대출 상품을 권유받은 뒤, 전 재산과 다름없는 대출 수수료 3200만원을 입금한 것이다. 좋은 경험 했다 치라는 박 형사(박병은) 앞에서 덕희는 직접 손 대리를 잡겠다고 나선다. 행동하는 자에게 행운이 온 것일까. 돌연 손 대리는 중국 칭다오의 보이스 피싱 조직에 붙잡힌 자신을 구해주면 돈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설득한다. 손 대리의 제보 사실을 전해도 경찰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덕희는 세탁 공장 절친인 봉림(염혜란), 숙자(장윤주)와 함께 칭다오로 향한다. 그곳에서 택시 기사인 봉림의 동생 예림(안은진)의 도움을 받아 손 대리가 있다는 옛 미싱 공장을 찾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체급 차이라는 약점, 추진력이라는 강점

<시민덕희>는 분명 힘 있게 전진하다가도 교차편집의 벽 앞에서 종종 동력을 잃는다는 약점이 있다. 한국에서의 덕희의 추적기와 칭다오에서의 재민(손 대리, 공명)의 탈출기가 번갈아 전개되는데 재민 파트가 덕희 파트의 강력한 파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인다. 과거 조폭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보이스 피싱 조직원 캐릭터와 그들의 거칠고 껄렁한 생활상은 안정감 있게 뻗어나가는 덕희의 발목을 잡는다. 완성도의 차이가 확연한 이야기의 바통 터치는 차이에서 오는 재미보다 불균형에서 오는 불안을 더 크게 안긴다. 칭다오 미싱 공장은 낙후된 지역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빛바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소로 소비되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민덕희>는 시민 영웅의 뭉클함과 사이다의 카타르시스를 두루 겸비한 영화다. “내가 뒷북이 아니라 김덕희씨가 빠른 거예요!”라는 박 형사의 말처럼 속도감 있는 전개를 자랑한다. 덕희가 시민 영웅으로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될 만한 요소들을 걸러낸 결과다. 영화는 어쩌다가 집에 불이 났고 왜 혼자 어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세탁 공장 동료들과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목 깁스와 바퀴벌레 한 마리로 그에게 돈 찾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인시키고 격 없는 간단한 대화로 동료들과의 친밀함을 효율적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효율성은 전반부 엄마로서의 덕희를 강조하는 두 장면에서 도드라진다. 그을린 자동차 장난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덕희의 얼굴과 아이들을 태운 경찰차를 따라 달리는 덕희의 눈물로 모성애를 명확히 보여준 뒤부터는 그에게 다시 엄마 역할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후로는 지도를 펼쳐 목적지에 동그라미를 치는 클래식한 탐정, 덤프트럭이 지나다니는 도로 위가 집인 모험가, 액션 신에서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 링 위의 복서 같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중년 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깬다.

보이스 피싱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민덕희>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빼서 확보한 시간을 이 범죄의 심각성과 피해 사례를 소개하는 데 집중한다. 덕희가 손 대리에게 당한 보이스 피싱 피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시퀀스가 그 예다. 자신도 당했다며 울먹이는 은행원 여성의 이야기는 "보이스 피싱은 아둔한 사람만 걸린다는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을 부수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표창원 프로파일러가 뉴스에 등장해 “보이스 피싱은 다 속을 수밖에 없는” 범죄라고 친절히 설명하는 장면을 삽입한 건 작위적이고 공익적으로 흘러간다는 비판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피해자는 잘못이 없으며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대사로 확실히 전달하는 일에도 시간을 쏟는다. 카메라는 “나? 피해자다” , “사기당한 게 내 탓이냐”, “절실한 사람 등쳐 먹는 네(총책)가 잘못한 거야” 등의 대사를 말하는 라미란의 얼굴을 또렷이 담아낸다. 그렇게 <시민덕희>는 이색적인 사건을 단지 웃음으로 소비하지 않고 피해자에 의한, 피해자를 위한, 피해자의 영화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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