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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최고의 메소드 배우 알 파치노와 <인썸니아> [1]

갱스터가 사랑한 남자,누아르가 포옹한 배우

흔히 뛰어난 배우에게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라는 표현을 한다. 무슨 역을 맡거나 어울리는 변신의 귀재에게 영화는 최고의 찬사를 바쳐왔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 늘 일정한 패턴으로 어떤 틀을 벗어나지 않는 배우라면 훌륭한 연기자로 평가받을 수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서부극의 존 웨인, 필름누아르의 험프리 보가트, 갱스터의 에드워드 G. 로빈슨, 청춘영화의 제임스 딘 같은 배우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의 말투, 행동, 자세는 대체로 변함없는 것이지만 그들을 연기못하는 배우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아마 알 파치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쥐어준 영화는 <여인의 향기>였지만 알 파치노가 빛을 발한 진짜 영화들은 갱스터나 형사영화였다.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로부터 시작된 알 파치노의 갱스터 연대기는 형사영화라는 굵은 가지를 치면서 거대한 나무가 되어갔다. 특정 장르의 스타라는 사실이 알 파치노에겐 전혀 약점이 아니다. 그가 현존하는 ‘최고의 메소드 배우 가운데 한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알 파치노는 <인썸니아>에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입증한다.

<인썸니아>에서 그는 30년 사건 현장을 뛰어다닌 LA의 베테랑 형사 윌 도머로 나온다.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알래스카를 찾은 그를 풋내기 지방경찰 엘리는 ‘살아 있는 전설’로 여긴다. “경찰대학 다닐 때 교과서에서 당신이 해결한 사건들을 봤어요.” 교과서에 있던 릴랜드 살인사건의 흔적이 윌 도머의 목에 나 있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의 눈은 반짝인다. “사건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법이지. 사소하다고 그냥 넘어간 게 있으면 꼭 다시 한번 보게.” 경외감에 가득 찬 엘리의 시선에 답하는 윌 도머의 충고는 믿음직스럽다. 깎인 손톱, 감긴 머리카락, 찢긴 사진 한장, 값비싼 드레스, 싸구려 추리소설 등 자잘한 단서가 모일 때 범죄의 퍼즐은 온전한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첫 만남에서 완전한 교감을 나누는 윌 도머와 엘리의 관계는 실은 알 파치노와 관객의 관계이기도 하다. 알 파치노가 노련한 형사로 나오는 순간부터 감독은 한 가지 짐을 던다. 따로 그 형사의 오랜 경험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눈가에 새겨진 그의 주름과 확신에 찬 말투만으로도 관객은 그의 노련함에 설득당한다. 윌 도머에 대한 엘리의 존경심은 알 파치노에 대한 관객의 신뢰에 기댄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거짓 증언이 촉발시킨 불면의 밤을 함께 지새우는 동안에도 우리는 윌 도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는 우리보다 훌륭한 양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종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배우의 이미지가 촉발시키는 연상작용에서 기인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벌벌 떠는 장면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극에 등장했던 과묵한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전율을 느끼게 한다. <스트레이트 스토리>의 리처드 판스워드가 평생 서부극의 스턴트맨으로 일했던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이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인썸니아>의 알 파치노를 보며 <형사 서피코>를 떠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락한 거대도시 뉴욕의 형사 프랭크 서피코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목숨걸고 싸우리라 다짐하지만 동료들은 그를 비웃는다. 마약상에게 뒷돈을 받고 거물급 범죄자를 보호해주는 경찰들에 둘러싸인 서피코는 철저히 고립되고 따돌림당한다. 분노와 항의는 묵살되고 회유와 협박은 죽음의 공포로 이어진다. 30년 전 서피코처럼 윌 도머도 고집스럽게 살았다. 살인자를 감옥에 보내는 정당한 법집행자라는 확신이 경찰 교과서에 실린 뛰어난 수사관 윌 도머를 만들어왔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외길 인생, 하지만 자기 존재의 증명을 단숨에 잃어버릴지 모를 순간이 닥친다. 윌 도머는 말한다. “그게 내 발목을 잡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8살난 아이를 죽인 자가 활개치는 세상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윌 도머는 증거를 조작하고 경찰 내사과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약점을 캔다. 뒤이은 동료의 사고사, 그것을 목격한 살인자의 전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윌 도머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시련과 마주한다. 알래스카의 백야는 바늘처럼 그의 눈을 찌르고 죽은 자의 기억은 천근처럼 무겁게 머리를 짓누른다. 서피코처럼 윌 도머도 현실의 지옥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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