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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리마스터링판 개봉하는 <위대한 독재자>,찰리 채플린(3)
2002-10-11

위대한 어릿광대,눈물로 빚은 웃음

그러나 <모던 타임즈>에 묘사된 공장의 현실이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깊이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 해도 떠돌이 찰리는 누구를 선동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그는 그저 눈먼 소녀에게 꽃 한 송이를 사거나, 빵을 훔친 소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언제나 굶주려 있지만 찰리는 삶의 허기를 빵으로만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서커스>에서 그는 당장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도 배고픈 소녀에게 빵과 계란을 나눠준다.

정녕 가난한 자의 양식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제할 도리가 없는 찰리의 낭만적 천성 이면에는 아무리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자기 옷매무새를 다잡는 당당한 태도가 있다. 거한에게 엉덩이를 걷어채고 경찰에 쫓기는 순간에도 찰리는 모자를 흘리는 법이 없다. 아니, 흘리면 꼭 다시 주워 쓴다. 단편 <개의 삶>에서 찰리는 ‘개 출입금지’라는 푯말을 무시하고 술집에 들어간다. 헐렁한 바지에 개를 넣고 바지 엉덩이에 난 구멍으로 삐져나온 개의 꼬리를 흔들면서 유유히 걷는다. 험악한 웨이터가 지키고 있지만 그는 굴하지 않는다.

주성치, 우디 앨런, 로베르토 베니니의 아버지

아무리 빈털터리고 남루해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항상 자기 삶과 사랑을 존중하는 찰리의 태도는 삭막하고 냉혹한 사회와 싸우는 힘이다. <시티라이트>에서 그는 자살하려는 백만장자를 말리며 말한다. “내일도 새들은 지지귈 텐데요”라고.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소녀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떠돌이 찰리의 뒷모습 다음에는 “우리는 잘될 것이다”라는 자막이 올라온다. 아무리 힘들어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찰리의 전언은 <키드>나 <황금광시대> 같은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가슴깊이 파고든다. 사랑하는 소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는 것을 축복하며 쓸쓸히 홀로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서커스>의 엔딩에서조차 우리는 떠돌이 찰리가 좌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는 목숨 걸고 줄타기 곡예를 하면 했지, 시도도 하지 않고 지레 포기하는 인간은 아니다.

<희극지왕>이나 <소림축구>를 보면 찰리의 인생관은 홍콩의 코미디 스타 주성치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희극지왕>에서 도시락에 군침 흘리는 주성치는 배고픈 찰리를, <소림축구>의 낡고 해진 운동화는 찰리의 커다란 구두를 연상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찰리가 무성영화의 자막으로 썼던 격려를 주성치는 직접 말로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감을 가져라”라고. 떠돌이 찰리는 <모던 타임즈>를 끝으로 사라졌다. 채플린은 떠돌이 찰리의 퇴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랜 친구는 오래된 구두와 같다. 괜찮은 데도 버리는 것이다.

초라한 인물이 어울리지 않았다. 원자시대에서 그런 인물을 등장시킬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대가 변하자 떠돌이에게서 아무런 자극도 구할 수 없었다. 건반 하나만 가지고 작곡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떠돌이 찰리가 자취를 감춘 시기가 채플린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완전히 옮겨간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에 채플린이 찰리를 대사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라고 판단했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좀더 중요한 이유는 작가의 관심이 변한 데 있는 것 같다. <위대한 독재자>로부터 <홍콩의 백작부인>에 이르는 후기 작품들에서 채플린은 스타이자 추방자인 자기 삶을 반영하는 듯한 이야기를 풀어갔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찰리 채플린은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전기 작품들이 ‘나는 살아 있는가’를 다룬 반면 후기 작품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고 지적한 대로다.

“이제 세상이 보이나요?”

70년대 모더니즘 비평이 득세하면서 채플린은 버스터 키튼에 비해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액션 스턴트로 이뤄진 희극을 창조한 키튼은 연민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채플린과 대조적이었다. 실제로 채플린 영화의 카메라 움직임은 키튼에 비해 단순하다. 계속 찰리를 쫓아다녔고 프레임의 중심엔 늘 찰리가 있었다. 그러나 키튼의 진가를 강조하기 위해 채플린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찰리의 슬랩스틱을 제대로 보여주자면 그처럼 단순한 카메라 움직임이 적합했던 것이 아닐까? <시티라이트>의 클로즈업과 애잔한 음악이 만들어내는 쓸쓸함이야말로 채플린 영화의 정수가 아닐까? 무엇보다 시간은 키튼을 복권한 것과 마찬가지로 채플린을 옹호했다. 장 르누아르의 <익사 직전에 구조된 부뒤>에 나오는 히피판 ‘떠돌이 찰리’ 미셸 시몽, <돈을 갖고 튀어라> <바나나공화국> 등 초기 영화의 우디 앨런, 주성치와 로베르토 베니니 등 찰리는 조금씩 모습을 바꿔가며 영화의 세기가 겪은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었다. ‘원자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 찰리는 앞으로도 많은 감독과 배우에게 창조의 열정을 자극하는 인물로 남을 것이다. 어쩌면 <시티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은 채플린의 예언이었는지 모른다. 찰리가 전해준 돈으로 시력을 찾은 눈먼 소녀, 그녀 앞에 감옥에서 나온 떠돌이 찰리가 남루한 행색으로 서 있다. 찰리를 백만장자로 오해했던 소녀가 말한다. “당신인가요?” 주위의 비웃음 속에 눈물을 글썽이며 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세상의 희극성에 대해, 그리고 비극성에 대해 눈을 뜬 것은 떠돌이 찰리 덕분인지 모른다. 소녀는 우리이고 찰리는 채플린이다. “이제 내가 보이나요?” 찰리의 물음에 소녀처럼 우리도 그저 한줄기 눈물만 흘릴 뿐이다.글 남동철 namd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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