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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테크니션,희대의 사기꾼 장이모를 비판한다 [2]
2003-02-04

어느 영화평론가의 고백,영리한 감독 장이모와 <영웅>이 불쾌한 까닭은?

장이모의 <붉은 수수밭>을 본 건, 아마도 89년일 거다. 상황도 기억난다. 친구들과 교외로 놀러갔다가 거의 밤을 새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피카디리극장으로 갔다. 지금은 감독으로 데뷔한 강문이 웃통을 벗고, 붉은 수수밭 잎에서 우뚝 서 있는 커다란 간판. 베를린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붉은 수수밭>은 부족한 잠 때문에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에는 최적의 영화였다. 돈 때문에 나환자에게 시집가는 여인. 그녀를 바라보는, 강인한 근육의 유이. 증오, 간통, 일본군의 만행과 처절한 저항. 도발적인 내용 이상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강렬한 이미지의 영상. <붉은 수수밭>을 보는 동안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동안 그 영상이 계속 머릿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붉은 수수밭>의 충격은 다시 나를 극장으로 인도했다. 그 시절만 해도,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느니 반드시 새로운 영화를 본다는 원칙을 갖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극장을 찾아, 가마를 메고 붉은 수수밭을 달리는 유이를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1/3 정도 지나면서 회의가 들었고, 절반을 넘어서자 혐오감이 일었다. 이건 가짜야,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붉은 수수밭>의 모든 것은, 이야기와 영상 모두 치밀하게 조작된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상극이라고나 할까. 장이모는 관객을, 그것도 서구의 관객을 현혹시킬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의 화면에 모두 담았다. 중국 오지의 엽기적인 생활, 중국의 이미지였던 ‘붉은색’의 대담한 활용, 원시적인 생의 에너지, 그리고 학살과 분노까지 모든 것을 철저하게 포장을 해놓은 것이다. 아니 포장이 아니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완벽하게 전후좌우를 맞춰놓았다. 장이모의 <붉은 수수밭>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원초적인 영화가 그렇게 작위적이라니. <붉은 수수밭>을 두 번째 보던 나는 겨우 토악질을 참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너무나 빨리 반하고, 너무나 빨리 혐오했다. 나조차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 웬일인가.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장이모의 영화를 나는 계속해서 보고야 말았다. 후배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내일 돌려줘야 하는 테이프라며 후배가 데크에 넣은 게 <국두>였고, 누님이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놓은 게 하필이면 <홍등>이었다. 젠장, 주변에 있는 영화는 아무리 쓰레기라도 무조건 본다는 게 원칙이던 시절이라, 그냥 봤다. 욕을 하면서 끝까지 봤다. 장이모 영화의 그 붉은색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으로 욕지기가 일었다. 염색공장이 무대인 <국두>에 대한 인터뷰에서 장이모는 말했다. 염색공장에 가본 적이 없다고. 염색공장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염색공장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라고. 장이모는 결과를 위하여, 예술을 조작할 수 있는 위대한 감독이다. 장이모는 어떻게 하면 관객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래서 나는 91년까지는, 확신하고 있었다. 장이모의 정체는 곧 탄로날 거라고.

위대한 예술가 혹은 사기꾼

1993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장이모의 <귀주 이야기>가 그랑프리를 받았다. 기사를 읽어보니, 공리를 제외하고는 시골 주민들을 실제로 출연시키면서 ‘네오 리얼리즘’영화를 만들었단다. 이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까. ‘조작과 현혹’의 귀재인 장이모가 철저하게 현장에 기반한 ‘리얼리즘’영화를 만들다니. 이장에게 맞은 남편의 억울함을 탄원하기 위하여 도시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조작’도 가하지 않은 그 ‘사실’을 보면서 나는 인정했다. 사기는 아무나 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귀주 이야기>는 대단히 잘 만든 리얼리즘영화다.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기교들은 모두 농촌의 흙먼지 아래 잦아들었다. 기교를 철저히 배제하고, 단지 그들의 삶 옆자리에 놓아둔 카메라로 모든 것을 말해준 것이다. 점점 형식에 갇히며,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의 함정에 빠져드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알고 있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만들어야 할 영화를, 장이모는 너무나도 잘 만들어낸다. 감정적으로는 반발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보여주듯 사기는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다. 천재적인 재능이 없을 때는, 한 사람이 아닌 세상을 속일 수가 없다. 때로는 위작을 그리는 화가의 작품이 위대한 예술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니 앤디 워홀의 업적도 사실은, 반은 사기 아니던가. 장이모는 어떻게 관객을 자극하고, 현혹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표현주의적 방식이든, 리얼리즘적 방식이든, 아니면 정말 단순한 드라마를 만들든 장이모는 능숙한 장인의 솜씨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제어한다. 적어도 그 만듦새만으로, 장이모는 위대한 거장이다.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만든 영화들이 똑같이 하나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이모가 위대한 예술가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한 위대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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