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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3]
김혜리 2003-02-28

----------사람들은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디 아워스>의 하루해가 저물 무렵 댈러웨이 부인과 로라는 살기로 한다. 버지니아와 리처드는 죽기로 한다(“사제이자 예언자인 시인은 나머지 우리가 삶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버지니아는 스스로 예언한다). 현대에 와서 죽음은 어느 시대보다 석연치 않고 불길한 것이 되었다. 죽은 자들은 패배하여 도주한 것일까. 하지만 버지니아는 “삶에서 도망침으로써 평안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채워넣고 호수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니까 자살은 삶의 회피일 수 없다. 샐리 포터 감독의 <올란도>에서 버지니아의 분신 올란도였던 틸다 스윈튼은 한 다큐멘터리에서 의구심을 털어놓았다. 현대사회는 진정한 열정은 용인하지 않으면서 지독히 센티멘털한 기묘한 곳이라고. 사랑은 그 안에 거하는 감정이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고 틸다 스윈튼은 말했다. 정말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사랑한다면 그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살거나 죽거나다. 자크 에밀 블랑슈가 썼듯이 인습적 삶에 대한 경멸을 오만하게 시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거기에는 버리고 말고 할 만큼 대단한 가치조차 있지 않다고 냉랭하게 통고하는 것일 터다. 그래서 어떤 자살은 삶을 진창에서 건져올린다. 이 생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위는 결국 나의 것이라고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디 아워스>는 우리를 조금씩 울게 만들지만 그 눈물은 비애에 연원하기보다 황홀한 불꽃놀이나 태아의 태동이 자아내는 눈물과 동일한 샘에서 솟는 것이다. 버지니아와 로라와 클래리사는 절망을 위해 절망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여러 장소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그 장소들이 존재하려면 고통이 따른다”는 누군가의 말은 그녀들의 영화 속 하루에 대한 예언과 같다. “우리는 명확한 이유도 없이 인생을 열심히 사랑하고 추구하고 자기 멋대로 꾸미고 자기 둘레에 쌓아올리고는 허물어뜨리고 한순간도 쉴새없이 다시 새로이 창조한다.”(<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사람들은 <디 아워스>를 ‘야만적 다수에게 고통받는 민감한 소수인종을 위한 자기도취적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삶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을 끈질기게 갈망하는 이유를 신만이 안다는 사실을 누가 몰랐던가 반문한다. 그러나 <디 아워스>의 놀라운 세 여배우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모욕을 금한다. 니콜 키드먼의 버지니아는 턱을 당기고 눈을 치뜨고 강풍을 거스르는 새처럼 오연히 걸어간다. 인생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한 다음에 내던져버리기 위해. 줄리언 무어의 로라는 절망적인 상냥함이 깃든 얼굴로 아이와 남편을 재우고 어느 새벽 버스정류장으로 나선다. 메릴 스트립의 클래리사는 겸손하게 타이른다. 서로를 위해 살아남으려고 하는 건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니? 소녀들은 두근거리며 꿈꾼다. 나도 나이들어 저런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이에게 그녀들의 하루는 절박한 기도고, 어떤 이에게는 사치다. 모두가 정당하다.

----------그러나 <디 아워스>는 유혹 따위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눈매를 하고서 그처럼 사치스러운 탐욕을 내게 충동한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백만개의 문장으로 쓰고 싶다. 충분히 사랑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백만개의 문장으로 쓰고 싶다. 치사량(致死量)의 삶을 누리고 싶다. 마치 당장 두팔로 끌어안고 맛볼 수 있는 향기로운 장미 다발이나 달콤한 케이크라도 되는 양, 지금 나는 그것을 아이처럼 철없이 강렬하게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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