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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2]
김혜리 2003-02-28

----------버지니아는 쓰고 로라는 읽고 클래리사는 책을 만든다. 처음 내가 쓴 글줄들은 일기였던가, 편지였던가. 그러나 어쩌면 회색노트를 나누어 썼을지도 모르는 첫 ‘독자’는 잊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사랑의 시작을 날짜와 시간까지 공기와 냄새까지 기억한다. 안녕, 나야. 다가오며 인사하는 그애를 둘러싼 하얀 빛의 부챗살이 충충한 학교 복도를 사라지게 했다. 머릿속이 말갛게 비었을 때에도 멍하니 세수를 하고 창을 여는 나의 입술이 멋대로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나를 놀라게 했다. 희열, 고통, 뭐라 부르건 난생처음 의심을 허락지 않는 감정이 날카로운 칼처럼 명치를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난 평생 너의 시선으로 내 삶을 검열하며 살게 되겠지. 시시때때로 네 비웃음의 환청에 소스라치면서. 그러나 흐른 시간이 세월이라 할 만한 두께가 되었을 때, 다시 만난 친구는 우리가 원한 것들이 아직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얼굴을 풀어헤치고 웃고 있었다. 덩달아 미소지으며 나는 겁이 났다. 이제부터는 그저 마음의 바닥을 뒤지며 근근이 연명하는 일뿐일까.

----------댈러웨이 부인에게 피터 월시가 그렇듯이 클래리사에게 리처드는, 로라에게 키티의 키스는, 전 생애를 그 빛에 비추어 보게 만드는 등대다. 갑판 위에 서서 바람을 맞을 때 산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무례하게 가슴을 열고 들어오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들은 등대를 지나쳐 조류에 휩쓸렸을 때도 배를 버리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자매’들은 사랑하는 자아를 넓히고 사랑의 대상을 확장한다. 끝없이 다시 태어나기를 열망한다. 올란도는 수 세기에 걸친 욕망의 역사를 관통한 다음 런던의 번잡한 시가지를 달려가고, 신디 셔먼은 끝없이 카메라 앞에서 육체를 조작해 거듭나는 의식을 치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펜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소묘한 인물들은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영매처럼 새로운 자아를 영접하고 스쳐가는 다른 영혼의 색에 붉게 푸르게 물든다.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사나이들은 그것을 정복해 못을 치고 싶어하지만, 그녀들은 떠다니며 스며들고 감싸면서 세상을 다 가지려 한다. 누군가를 그의 곁에 있는 타인들과 함께 그가 서 있던 장소와 더불어 이해한다. 그녀들은 종을 대표하는 단수로서 나를 격려한다. 지금 여기 보이는 너는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나에 비해 하찮다고. “그녀는 고향에 있는 나무들의 일부분이며 그곳의 초라한 집의 일부분이며 그녀가 결코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사이로 안개처럼 풀어져 나무 위를 흘러간 안개처럼 그 가지에 얹혀 그녀의 삶을 그녀 자신을 두둥실 먼 곳으로 띄워 보낸다.”(<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이상하다. 이처럼 완전한 해체와 부재의 고발로 삶을 충만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다니.

----------나는 피아노도 그림도 매우 서툰 여자아이였다. 교습 학원에 가야 하는 날이면 오전부터 마음이 어두워졌다. 글을 쓰고 자판을 두드리게 되고 나서는 가끔 소곡을 뜻대로 연주하고 있는 것 같은 희미한 환상을 갖는다. 여기는 강하게 여기는 어루만지듯이, 보이지 않는 너그러운 누군가가 귀를 기울일지도 모른다는 몽상에 젖어서. 맨 처음 글을 쓰게 만든 완전한 몰입과 사랑의 기억이 개기일식만큼 드문 것임을 배운 뒤에도 나는 왜 멈추지 않았을까.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가 맞는 대답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파티를 열고 케이크를 굽고 병자를 간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읽고 쓰는 일도 치욕스런 패배의 연속이다. 어느새 나는 무엇을 읽고 썼는지 잊어버리는 일조차 더이상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디 아워스>의 침묵과 휴지(休止)의 시간은 나를 위협한다. 손을 뻗어 잡으면 모두 문장으로 변할 것만 같다. 그 무형무음의 막간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말에 적합지 않아 우리가 굳이 말로 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다시 말로 바꾸는 일은 무익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쓴다. 어디로도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을 뿐이어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일상은 글로 옮겨지면서 적어도 일정한 형상을 얻는다. 종잡을 수 없는 얼룩의 상태를 벗어난다. 어느 날에는 삶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글 한줄을 쓸 수 있을까. 그 역시 벗어놓은 더러운 속옷처럼 보인다 해도.

----------언젠가부터 영화를 볼 때 나의 나이는 너무 많거나 너무 적거나 둘 중 하나가 됐다. 영영 상실한 시간 혹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을 데려다놓는 영화는 신통하게도 많지만, 지금 내 곁을 스쳐가고 있는 시간, 우리가 곧 걸어들어가야 할 시간을 건져올리는 영화는 진귀해졌다. <디 아워스>에서 30대의 로라, 40대의 버지니아, 50대의 클래리사가 보여주는 중년과 노년의 24시간은, 청춘이나 죽음의 풍자와 모방이 아니다. 그녀들은 순간순간 청춘을 기억하고 죽음을 상기하며 나아간다. 그녀들은 가래로 눈을 치우듯 밀고 쌓아올린 바로 그 시간의 무게에 기대어 <디 아워스>가 택한 생의 어느 날, “우리보다 행복할 수 있던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 사랑이 많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디 아워스>는 과거와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일 수 있는 시간을 질투하는 영화다. 그리고 질투를 통해 삶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것은 아주 깊이 가라앉아 기도와 비슷해진 사랑이다. 자기를 버리고 눈을 감아 빛을 버리고 좁은 우물의 바닥 같은 평화를 대가로 얻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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