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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영화,세편의 에세이 - <디 아워스> [1]
김혜리 2003-02-28

生과 死의 외침과 속삭임<무간도> <8마일> <디 아워스>를 보는 세 가지 시선

이 영화, 죽입니다, 라고 부르짖는 영화광고들 사이에서, 웅크린 채 조용히 읊조리는 영화들이 있다. 크기와 자극과 속도를 웅변하지 않고, 잠깐 멈춰 귀기울이면 당신과 속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수줍게 손 내미는 영화들이 아직 있다. 아마도 지난 주말은 그런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최상의 주말이었을 것이다. 늙음과 상실에 관한 비가 <디 아워스>, 비열한 거리의 음악과 지친 삶에서 길어올린 생의 찬가 , 사라진 시대, 사라진 영웅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만가 <무간도>가 함께 찾아온 까닭이다.

여기 세 영화에 대한 세 사람의 에세이를 싣는다. 흥에 겨운 찬사가 아닌 이런 나지막한 독백이 이 영화들에 보내는 우리의 진심어린 박수를 대신하고도 남으리라고 믿는다. - 편집자

생이여,

김혜리 vermeer@hani.co.kr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버지니아, 로라, 클래리사, 그리고 나 - <디 아워스>를 둘러싼 네 여인의 초상

----------이 방에는 꽃이 필요해. 차고 흰 벽 앞에서 눈을 뜰 때마다 생각한다. 스물아홉살 겨울에 생긴 나만의 방. 그러나 꽃을 사러 나가지는 않는다. 대신 이따금 빨래를 널면 그것들은 놀랄 만큼 빨리 마른다. 나의 몸도 굴뚝 속처럼 메마르다. 손을 뻗어 물잔을 더듬는다. 일어나. 수천번도 넘게 있었던 아침이야. 이건 혹시 어릴 적 읽었던 지루하고 뻔한 소설 속의 세계가 아닐까. 책장에서 얼굴을 들었는데도 마음은 뒤늦게 현실로 돌아와 굼뜨게 깜박거리고 내 자신의 혼이 내 몸으로 다시 빙의되는 이물감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 데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 여자는, <디 아워스> 안에도 모로 누워 있다. 내가 영화를 보고, 영화가 다시 나를 본다. 1923년의 버지니아와 1951년의 로라와 현재의 클래리사. 그들은 모두 문을 등지고 누워 있다. 별안간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도 덜 당혹스러울 자세로. 눈을 뜨고도 여자들의 몸은 한참 동안 일으켜 세워지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오늘 주최할 파티가 있다. 케이크를 굽고 꽃을 꽂지 않으면 그녀의 사랑을 반문할 사람들이 있다. 셋은 어느 바다의 깊은 곳에서 연결돼 있다. 버지니아가 손바닥에 담아 올린 세숫물은 클래리사의 얼굴 위에 흩어지고 로라의 자상한 남편이 싱크대 찬장문을 덜컥이면, 클래리사가 창가에 서 있다. 버지니아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을 쓰면 로라는 그것을 소중히 읽어내리고, 클래리사는 소리내어 말한다. “꽃은 내가 사야겠어.” 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믿기에 모든 일이 잘되어가는 척하는 호스티스의 안간힘은 터져서 갈라진다. 버지니아가 외투 호주머니에 돌을 채우고 호수로 걸어 들어간 지 10년 뒤, 로라는 핸드백을 알약으로 채운다. 동굴 같은 호텔 방 침대에 알약을 늘어놓고 비로소 책과 단둘이 된 로라의 상념은 버지니아의 낮은 음성을 빌려 천장을 울린다. “나는 더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아. 죽음은 커다란 위안이 될 수도 있어. 거기에는 무서울 정도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을 수도 있어.”

----------긴 인생의 단 하루. 단 하루에 쓸어 담겨진 평생.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은 세 여인의 일기가 실은 한 페이지에 쓰여졌음을 보이기 위해 왈츠의 바쁜 리듬으로 장(章)을 갈아치웠지만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는 시간을 생포하는 영화만의 예민한 손가락으로 세 가닥의 멜로디를 민첩하게 탄주한다. <디 아워스>의 통주저음, 보이지 않는 제4의 여인은 댈러웨이 부인이다(<디 아워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쓴 <댈러웨이 부인>의 가제였다). <디 아워스>의 버지니아, 로라, 클래리사는 피카소가 그린 여인의 초상처럼 댈러웨이 부인의 모습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는 삼면경이다. 더없이 쾌청하고 평온한 오후, 네 여자는 게를 요리하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며 죽느냐 사느냐를 자문한다. 모든 재난과 이별이 심중에서만 일어나는 <디 아워스>는 하이 컨셉의 대척점에 있다. 그러나 관객은 예기치 않게 이중의 서스펜스에 사로잡힌다. 하나는 즉흥 연주를 다시 즉흥 변주하는 주자를 구경하는 스릴이다. 당대에 이미 아방가르드로 간주된 작품을 변주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다시 거대 예산 예술영화로 가공한 이 영화가 위험천만한 세번의 공중돌기에서 살아남아 보여주는 우아한 착지는 그래서 거의 기적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릴러의 관객처럼 숨을 죽인다. 세 여자의 궤적은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나와 그들은 어느 거리에서 마주칠 것인가, 마음을 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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