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3]

결국 첸카이거는 다시 <투게더>로 돌아왔다. <황제와 암살자> <킬링 미 소프틀리> <투게더>는 그 의미상의 위치가 서로 다르다. 오히려 <황제와 암살자>는 알레고리화의 속임수를 덜어낸 첸카이거의 솔직함을 보는 것에 반갑다. <킬링 미 소프틀리>는 철저한 실패작이지만, 그 실패의 의미를 장르에 대한 인식부족과 시스템에 대한 역부족으로 충분히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투게더>는 그 둘 모두와 다르다. <투게더>는 테크니컬한 면에서 결코 뒤처지는 영화가 아니다. 또 <황제와 암살자>에서 보여준 인성에 대한 연구는 이제 이 영화에서 소박한 믿음의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다. 때문에, 이 영화를 기술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때 입을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첸카이거가 다시 한번 외국소설 중 하나를 골라 취향에 기대어 휴머니즘을 말했더라도 모순은 별로 커보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첸카이거는 이 영화의 메시지를 “현재 중국사회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사회의. 반영. 아버지와 아들의 애틋한 가족애가 현재 중국사회의 반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첸카이거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빼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대신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부자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살냄새 풍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이 영화 속의 부자는 여전히 현재 중국을 살아가는 바로 그 사람들 중 일부이다.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는 이들의 행복한 결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일말의 사회적 관계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영화에 사회가 들어서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첸카이거가 말한 의미대로라면 이 영화에는 사회의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도 첸카이거는 인물들을 실내에 가둬두고 베이징의 대도시 바깥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이들 부자와 대도시 베이징의 불운한 관계는 아버지 뒤에 높이 서 있는 빌딩, 그 한 장면에서만 드러날 뿐이다. 혹은 릴리의 도시적 또는 자본주의적 욕망은 그렇게 오랫동안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왜 삭제하고 분리시키는 것일까? 심지어 그는 이런 가족들이 현재 베이징에 수없이 많으며 그들 대부분이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생한 증언까지 들려줬다. 보는 사람에 따라 <투게더>가 결국 베이징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골로 쫓겨나는 슬픈 부자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첸카이거는 이 영화를 모순되게 진술한다. 텍스트만을 놓고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 영화를 정의하는 그의 방식이 영화 위에 덮이면 모순된 상황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 진술이 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지 않고 비워놓은 것들을 더욱 따지고 들게 한다. 정말 중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결과가 아름답다면 그들 모두 행복해지는 걸까?

<투게더>는 어떤 티끌도 없이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둘러싼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이웃 건너 우리까지 알고 있다. 첸카이거에 대한 판단은 한번 더 미뤄져야 할 것 같다. 글 정한석 mapping@hani.co.kr ·사진 장준환 jungjh@hani.co.kr·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첸카이거 감독 인터뷰“지아장커? 훌륭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몇이나 봤는가”

<투게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버지만 시골로 돌아간 것인가.

→ 사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모른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정이 깨지는 것이 될 테고, 아들만 남는다면 성공하기 위해서 그 이전의 정을 버리는 것이 될 테고. 하지만 성공을 나쁜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성공과 행복은 같이 존재할 수 있다.

왜 이 영화 속의 유 교수 역을 당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첸카이거는 <투게더>에서 유 교수로 등장하며, 이미 <황제와 암살자>에서 진시황의 아버지 루브웨이로 등장한 적이 있다).

→ 사실 그 연기자를 찾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어쩌면 그 인물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첸카이거 당신일 수도 있다, 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해보기로 했다.

이제는 영화의 정치적 저항에 반대하는가.

→ 현재의 중국 상황, 영화의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전의 시대와 매우 비슷한 인상을 지금도 받는다. 아직도 표현의 자유가 많이 막혀 있다. 그러나 항상 그것에 대립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뭔가 발전을 지향해야 하고, 생존해나가야 한다.

주목할 만한 6세대 감독과 작품은.

→ 지아장커, <소무>.

지아장커는 당신의 요즘 행적을 두고 배반이라고 비판했다.

→ 영화와 영화인은 변해야 한다. 변화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더불어 나는 지아장커의 영화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도 꼭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이다. <소무>는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그 영화를 본 사람은 얼마 없다. 몇몇 ‘지식인’들 사이에서나 회자되는 것이다. 영화의 재생산을 위해서, 영화를 계속해나가는 생존의 의미에서 계속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5세대를 규정하는 말이 바로 그 ‘지식인’이었다.

→ 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은 나에게는 기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영화감독이 지식인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식인 영화감독으로서 인간관계의 기본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영화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영화’에 대한 소견은.

→ 미국영화에 대한 대항의미. 각각 특색있는 모습을 만들어가기보다 동방, 아시아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아시아영화의 개념이다.

<현 위의 인생> <패왕별희>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비판한다.

→ 실질적으로 500년 동안 전세계의 문화를 지배해왔던 것은 서구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문화는 500년 전에 이미 많은 몰락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지금 문화활동, 영화을 하고 있는 예술인으로서 내가 이미 너에 비해 약자이니, 계속 약자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상업영화를 발전시켜 많이 전파하고 그 힘을 기르고, 아시아 문화의 강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