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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로 돌아온 첸카이거의 진실 혹은 모순 [2]

<영웅>능가하는 <황제와 암살자>

한국에서 첸카이거는 시네마테크의 보물에서 예술영화의 거장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국제화의 시작을 알린 <현 위의 인생> 이후 첸카이거는 칸에서 <패왕별희>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영화에 관한 평가들은 엇갈리기 시작했다. 다시 보아도 분명한 건(내 입장에서) <패왕별희>에서의 역사적 지표들은 이 영화를 알레고리적으로 읽도록 유혹하고 있는 함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황토지> <대열병> <해자왕>에 들어 있는 내셔널 알레고리, 또는 미학적 창조력을 어떻게 포장해야 서구의 관심권 안으로 더 진입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황토지>

<패왕별희>

영화 속 주인공인 샬로와 데이의 동성애적 애증의 소사는 마치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들과 다면적으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만 평행할 뿐이며, 비스듬히 지나치고 있다. 원작과 달리 첸카이거는 동성애적 플롯을 기입해넣었고, 역사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척했고, 전통(경극)의 미를 스펙터클화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을 팔아먹었다. 비판이 시선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다음 작품에 대해 의심에 찬 목소리들이 높아갔다. 첸카이거는 증명이라도 하듯 <풍월>을 만들었다. 청조 말기에서 시작한 방씨 일가의, 또는 그 집안 하인의 러브스토리는 아편처럼 헤어나올 수 없는 형식주의의 중독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첸카이거의 존재감은 장이모의 그것보다도 더욱 흐릿해져 갔다.

1999년 첸카이거가 <황제와 암살자>라는 영화를 만들었을 때 서구의 저널리즘은 섣불리 <글래디에이터>에 비교해가며 이 영화를 ‘역사적 스펙터클’의 재현에 중심을 둔 것으로 규정했다(하긴 그들도 그때까지는 장이모의 <영웅>을 못 봤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황제와 암살자>는 결코 역사적 스펙터클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만약 유사한 소재이기 때문에 <영웅>과의 비교가 가능하다면, 이 영화는 장이모의 스타일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진시황을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첸카이거가 여기에서 주력하는 것은 황제와 암살자 사이에 벌이는(그리고 관객만 멍하니 속고 있는) 장이모식 속임수가 아니라, 인간 진시황의 이면에 중심을 둔 촘촘한 서사화이다. 영화는 총 5장으로 나눠져 있다. 러닝타임도 2시간43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진시황과 암살자는 왕비의 행적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는 5장에서 만나게 된다.

<영웅>의 진시황이 위엄과 패기로 일국의 황제감이라면, <황제와 암살자>의 진시황은 단지 용포를 두르고 있을 뿐 사욕과 애증과 후회와 반성으로 점철되어 있는 한명의 인간일 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황제와 암살자>인 이유는 암살자 징커의 삶과 황제의 삶이 동일한 가치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의 고민은 같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죽여나가야만 한다는 숙명. 영화는 ‘대의’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의’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고 싶어한다. 아니 역설한다기보다는 이야기화하고 싶어한다. 완전히 추락한 것처럼 보였던 첸카이거는 <황제와 암살자>의 서사화 방식을 통해 방향을 선회한다. 거대한 중국 역사의 원류를 다루면서도 첸카이거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인간들의 인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첸카이거가 <투게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소박한 인간미는 이미 여기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풍월>

<킬링 미 소프틀리>

<투게더>, 아름다움, 퇴행

그리고 나서 첸카이거는 영국으로 건너가 니키 프렌치의 원작으로 <킬링 미 소프틀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이 영화를 그저 장르영화에 대한 첸카이거의 습작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애덤과 앨리스는 충동적인 욕망을 결혼생활로 이어가지만, 애덤의 의문스런 과거들이 밝혀지면서 미궁에 빠지게 된다. <가디언>의 피터 브래드쇼와 게비 우드는 첸카이거가 니키 프렌치의 원작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고, 배우들(에더 그레이엄과 조셉 파인즈)을 망가뜨렸고, 서스펜스 장르에 대한 느낌도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등등 한목소리로 신랄하게 독설을 퍼붓는다. 그런데 이건 <킬링 미 소프틀리>를 보고 나면 수긍이 간다. 이 영화는 다른 의미보다도 일단 테크니컬한 면에서 뒷심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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