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국가대표 편집기사 김현의 영화인생 7막8장 [2]

#2.

새벽의 남산야외음악당.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기상나팔처럼 들려온다.

음악당 무대 한구석에서 신문지 덮고 자던 김현은 부스스 몸을 떨며 일어났다. 자기 어깨와 팔을 쓰다듬으며 남산에서 내려와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시장골목에서 상인들이 나무를 때다가 불씨가 남은 드럼통을 찾았다. 그 옆에 누워 못다 한 잠을 청한다.

60년대 후반, 그때만 해도 시장이 많았다. 닥치는 대로 시장 바닥에서 리어카 끌고, 아무 데서나 자고, 하루에 한끼 먹으면 다행이었다. 끼니 해결이 안 돼 며칠씩 굶게 될 때면, 저녁 무렵에 무교동에 나갔다. 식당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주면, 식당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은 밥을 준다. 식당엔 들어가지 못하고, 식당 밖에서 비오는 날이면 빗물에 밥말았다손 치고 먹던 그 밥이 이후에도 김현의 기억 속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으로 남았다. 그 무렵, 첫 주간지인 <주간한국>이 나왔다. 그걸 팔러 명동으로, 시청 앞으로 나다녔다.

서울 온 뒤 맞은 첫 추석 때 집에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화신백화점에서 옷을 한벌 샀다. 그걸 보물단지처럼 의자 뒤에 걸어놓고 무교동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와보니 옆에서 구두 닦던, 서울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친구가 그 옷을 들고 사라졌다. 집에 못 간 채, 시장도 무교동 식당도 다 문을 닫고 혼자 남아 버텼던 그해 추석은 죽도록 서러웠다. 시청 앞에서 <주간한국>을, 지나가던 검은색 큰 승용차 안의 손님에게 팔았다. 잡지를 건네줬더니 돈을 안 주고 냅다 중앙청쪽으로 달려 가버렸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모두 그를 속이고 달아났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영화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김현은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수시로 피를 팔았다. 그 돈으로 극장에 갔다. 명절 무렵이면 암표상들로부터 표 사달라는 부탁과 함께 돈을 받고는, 표를 사서 그냥 극장에 들어갔다. 마침 아메리칸 뉴 시네마 바람이 불던 그때, 주옥같은 영화들이 쏟아졌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워터프론트> <젊은이의 양지>…. 아침에 극장에 들어가 밤늦게 나왔다. 배가 고파 몽롱해진 상태에서도 보고, 보고, 또 봤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에게 영화는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부터 세상 살아가는 실무까지 모든 걸 가르쳐줬다. 그에게 “내 인생의 스승은 좋은 영화”였다.

#3.

최인현 감독, 김지미 주연의 <오복문> 촬영현장. 당시엔 허허벌판이던 지금 강남 봉원사 부근

김현은 얼굴에 니스칠을 한 뒤 수염을 붙이고 포졸 옷을 입었다. 옆에서 엑스트라를 지휘하는 스탭이 앙상하게 마른 그를 보고 말했다. “너 고함 제대로 지르겠냐?” 다른 엑스트라들과 함께, 김현은 보란 듯이 “와!” 외치며 달려갔다. 고함은 질렀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쉬는 시간에, 감히 엑스트라 주제에 최인현 감독에게 말했다. “빨리 찍죠. 배가 너무 고파서.” 김현은 그때 여섯편가량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옷이 시원치 않아서 만날 사극, 포졸 역할만 했다. 거기서 영화를 어떻게 찍는지 곁눈질 할 수는 있었지만, 영화에 다가설 연줄은 이어지지 않았다.

서울 와서 거지처럼 살던 2년 동안, 그에겐 유혹도 있었다. 시장에서 마약이 돌아다녔고, 남대문에 유곽도 있었다. 그가 돈 한푼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유혹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여자뿐이 아니었다. 술, 담배 모두 20대 중반까지 모르고 살았다. 오로지 영화, 스크린에 투사된 빛과 그림자와 조합에 불과한 그 허구가 김현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에게 영화는 꿈이자, 스승이자, 유혹에서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하루하루의 노역 속에 몸과 마음이 시들고 있었다.

서울역 주변에 상인들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많았다. 김현은 막 지갑을 가로채려는 소매치기를 보고 말렸다. 곧이어 패거리들에게 서부역 뒤 화물차 주차장으로 끌려갔다. 실컷 두들겨맞고 트럭 화물칸에 쓰러져 실신했다. 깨어보니 트럭이 출발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몸은 피투성이이고, 장마철에 장화 신고 계속 짐을 부린 탓에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뛰어내렸다. 한강에 떨어졌지만 한강대교 중간 섬 가까이였다. 헤엄쳐서 나온 김현은 젖은 옷 군데군데 핏자국을 남긴 그대로 전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왜 서울에 왔던가. 영화 하자는 것 아니었나.”

“그땐 꼭 죽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싫은 거 있잖아요. 한창 꿈과 이성을 다듬어가야 할 20대 초반에 인성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거죠.” 고생이 사람을 만든다는 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금언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웃으며 말하지만, 김현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듯했다. “영화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돈을 모을 다른 일을 생각했겠죠. 이런 삶, 무모하지 않아요? 그럴 가치가 있었던 걸까요?”

#4.

용산 오리온전자 옆 신필림 사무실 입구. 영화의상을 담당하는 할머니가 밖에 나와 있다.

김현은 무작정 신필림을 찾아갔다. 사무실 입구에 서 있던 할머니가 어디로 가라고 했다. 가봤더니 소도구 만드는 곳이었다. 활이나 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는 만들라고 했다. 신상옥 감독의 <대폭군> <다정불심> 같은 사극을 찍을 때였다. 몇달 동안 일했는데, 돈줄 생각도 안 하고 달라는 말도 못하고, 수시로 밥 굶고, 생활은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연출을 꿈꾸었던 김현은 불만이 쌓여갔다. 안양촬영소에서 <내시>를 찍을 때, 조감독이었던 이장호와 크게 싸웠다. “왜 소도구를 준비 안 했냐”는 질책이 기폭제가 돼 김현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말을 거의 안 하고 지내던 그가 “왜 내가 그걸 준비해야 하냐”며 맞받아쳤고, 주변 사람들이 놀라 웅성댔다. “어, 쟤가 말도 하네.” 추석 때 이장호 조감독이 김현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때 김현은 처음으로 남에게 자기의 사연과 연출을 하고 싶은 꿈을 털어놓았다. 69년 1월1일, 김현은 신필림 편집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순정에, 영화가 처음 반응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제 진짜 영화를 만드는구나.”

당시 한국영화는 신필림이 반, 나머지 회사들이 반을 만들어 영화판을 신필림과 충무로로 나눠 불렀다. 신필림은 직원이 500∼600명, 1년 제작편수가 30여편에 이르렀다. 편집실엔 오성환 기사와 여자 둘, 할리우드에서 가져온 무비올라 편집기 4대가 있었다. 김현은 러시필름을 붙이고 감는 일부터 시작했다. 편집실이라는 데가 누가 뭘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었고, 그는 혼자서 엔지난 필름으로 나름대로 편집해보며 스스로 익혀가야 했다.

신상옥 감독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몰라서인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이장호 조감독이 신 감독의 입에서 처음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통금이 있던 그때, 신 감독은 야간통행 허가증이 부여된 차를 몰고 다녔다. 신필림 편집실을 안양촬영소 안으로 옮긴 뒤, 김현은 그 안에서 살았다. 24시간 대기조였다. 편집실 구석에 웅크려 자고 있던 어느 날 신 감독이 나타났다. “현아, 예고편 만들자.” 마침내 영화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아.” 신 감독의 72년작 <삼일천하 김옥균> 크레딧에 ‘편집 김현’이라는 네 글자가 박혔다.

감독들이 말하는 김현

배창호 내 영화 16편 가운데 10편을 그와 함께했다. 나는 스타일이 드라마적 편집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 아니다. 원래 머릿속에 있는 순서대로 한다. 문제는 디테일한 호흡을 살리는 거다. 내가 한 영화들이 감정이 중요한 게 많아서, 그 길이가 조금만 길거나 짧아도 흐트러진다. 김현은 사람 바라보는 눈에 깊이가 있어서 그걸 잘 잡아준다. 편집의 호흡도 그 사람의 자세와 됨됨이에서 나온다. 나하고 삶에 공감대를 느끼는 부분이 많아서인지 참 좋았다. 원래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작품에 대해서, 감독은 누구든지 자기도취에 빠지는데, 좋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데, 그런 말을 안 한다. 그만큼 신중하다. 그는 편집 끝내고 한잔하러 갈 때 당시 편집실 화장실에 높게 달린 스위치를 발로 차서 끈다. 일 끝내고 술 먹으러 나가는 즐거움이겠지. 그걸 보고 나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김성수 박광수 감독 연출부로 <그들로 우리처럼> 할 때 그를 처음 봤다. 단편영화할 때도 부탁을 해서 편집을 해주셨다. 데뷔한 이래 4편 모두 그와 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단순히 편집 테크닉보다 영화를 읽는 문학적 해석능력의 뛰어남이다. 큰 흐름으로 맥락을 잡아준다. 그가 어떤 제안을 했을 때, 내가 잘 못 받아들이면 감독 생각을 늘 존중해주시니까, 니가 좋을 대로 해라, 그렇게 갈 수도 있지 한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계속 환기시킨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고집부리느라 안 듣다가도, 설득이 된 적이 많다. 지금은 거의 무조건 따라간다. 감독들 고민 중 하나가 숏을 여러 개 찍었을 때, 오케이 컷을 건져내야 하는데 고려할 게 조명, 인물 움직임 등 여러 개다. 어떤 걸 우선 순위로 놓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 이 숏이 좋다, 이런 이유에서. 그런 말 해주는 편집기사는 그밖에 없다. 롱숏으로 이어주는 박광수, 허진호, 이창동 이런 호흡은 거기에 맞춰주고. 나처럼 숏 잘라붙이는 병에 걸린 사람은 또 거기에 맞춰준다. 운동감, 리듬감도 뛰어나다.

강우석 <공공의 적> 빼고 내 영화 다 그가 편집했다. 지금 젊은 편집기사들은 말을 많이 한다. 실력보다 말이 앞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노련미, 드라마 전체를 보는 눈이 상당히 노하우도 있고, 관록이 있다. 관객이 뭘 원하는지, 어느 부분이 불필요하고 어느 부분에 힘을 줘야 할지를 잘 안다. 코미디의 경우 찍어놓은 화면을 보고 김현 기사가 웃었다, 그러면 극장이 난리난다. 워낙 웃음이 없는 사람이어서. <투캅스> 때 워낙 웃기에, 뭐냐, 장난이냐, 물었더니 아니 정말 웃긴다고 했다. 코미디할 때 그런 말이 있다. 김현 기사를 웃겨라, 그럼 끝난다. 그는 못 찍어온 필름에 대해 욕을 많이 한다. 이걸 뭐 이렇게 찍었냐고 구박한다. 다른 편집기사들하고 다르다. 자기가 편집한 것은 다 좋다고 하는데, 이 양반은 이 영화를 내가 편집하고 있는 게 창피하다, 그런 말도 한다. 독특한 사람이다. <공공의 적>을 그의 제자인 고임표 기사와 했는데, 고임표는 잔재주가 상당히 많다. 속에서 재주 부리는 건 고임표가 탁월하다. 드라마 전체를 보는 건 김현 기사가 훨씬 낫고.

박광수 사람이 매우 진실하다. 편집하면 어떤 신이 안 좋아도 좋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안 그렇다. 정직하고 진지하다. 영화계에서 오래 일해서. 한국 영화사 흐름을 전체로 잘 알고 있고, 극장에 옮겨졌을 때 화면 크기 변화 같은 걸 잘 안다. 극장까지 가서 후반작업 문제점을 지적해주기도 하고. 데뷔작 <칠수와 만수> 때, 김현 기사가 스탠백을 가지고 동시녹음을 처음 하고 있었다. 또 유영길 촬영감독 등 주변 영화인들이 다 그를 신뢰했고. 그래서 찾아가 인연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전 작품을 그와 함께 만들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