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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 38편 프리뷰 [7]
홍성남(평론가) 2003-04-18

굶주림과 폭력의 미학

추천작 Part V - 글라우버 로샤, 쓰치모토 노리야키

<바라벤토>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동풍>(1969)에는 두팔을 벌리고 교차로에 선 한 남자가 어느 젊은 여자에게 영화의 길을 가르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미학적, 철학적 탐구로 향하는 길과 제3세계 영화에의 길을 알려주는 그 남자는 바로 브라질의 영화감독인 글라우버 로샤(1938∼81)다. 그런데 왜 로샤였을까? 이 질문은 당시에 그가 세계의 지적인 영화감독과 관객에게 어떤 상징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따져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올 것이다. 요약하자면, 당시의 로샤는 매혹적인 미학과 도발적인 지성, 그리고 혁신적인 정치적 의식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고 하는 영화, 즉 ‘제3세계 영화’의 이미지를 한몸에 요약하는 시네아스트였다. 다시 말해 그는 고다르의 영화 속에서처럼 또 다른 ‘새로운 영화’를 깊이 고민하고 탐구하는 현대영화의 교차로에 놓아도 좋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0대 시절에 이미 영화평론을 썼고 시네클럽 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로샤는 56년에 작은 영화사를 차려 몇편의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2년에 첫 장편 <바라벤토>(Barravento, 80분)를 내놓게 된다. 소재나 그 처리방식에서 다분히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를 연상케 하는 이 영화는 어촌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곤궁한 삶을 리얼리즘적이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냈다. 로샤의 이름이 브라질의 새로운 영화운동인 ‘시네마 노보’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 탓에 로샤의 이 데뷔작도 흔히 시네마 노보가 배출한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을 듣곤 한다. 그러나 로샤 자신은 원래 넬슨 페레이라 도스 산토스와 루이스 파울리노 도스 산토스가 시작한 이 영화를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니 온전히 로샤에게 속하는 그의 첫 번째 걸작은 두 번째 영화인 <검은 신, 하얀 악마>(Black God, White Devil, 1964년, 125분)라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지주를 죽이고 도피하는 남녀가 성인(검은 신)과 그 다음에는 산적(하얀 악마)과 연루되는 이야기를 통해 억압당하는 자가 갖는 희망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방가르드적인 영화형식 안에다가 브라질 고유의 문화적 요소들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놓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로샤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영화다.

여기서 로샤가 주창하는 시네마 노보의 주요 이론을 잠깐이라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는데, 폭력과 비참한 고통으로 가득 찬 영화 <검은 신, 하얀 악마>는 그 다음해에 로샤가 개진하게 될 시네마 노보의 미학, 즉 ‘굶주림의 미학’과 ‘폭력의 미학’을 예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샤는 시네마 노보가 먹기 위해 절도하고 살인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다루었기에 굶주림이란 주제는 그들의 논의의 대상이고 이야기의 대상이며 분석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토록 괴로운 굶주림을 가장 잘 표현하는 행위가 폭력이라고 이야기한다. 로샤는 그래서 자신들이 “고함을 질러대는, 슬프고 추하며 절망적인 영화들”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굶주린 문화야말로 그것의 진정한 구조를 인식하게 되고 또 사회적 변혁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시작해낼 수 있다면서.

1967년에 로샤는 브라질의 최근 역사를 우화적으로 다루는 세 번째 영화 <고뇌하는 땅>(Land in Anguish, 115분)을 만들었다. 죽어가는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이 정치적 영화는 효율적인 정치적 분석을 제공함과 동시에 놀랄 만한 형식적 혁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격찬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다소 직접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를 다루었던 로샤는 다음 영화인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Antonio das Mortes, 1969년, 95분)에서 다시 <검은 신, 하얀 악마>를 연상케 하는 신화적인 공간으로 돌아온다. 지주에게 고용되어 산적들을 죽여왔던 ‘죽음의 안토니오’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혁신적 형식미로 담아낸 이 정치적 웨스턴은 로샤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다. 1968년에 브라질에서 두 번째 쿠데타가 벌어지자 로샤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1971년 망명길에 오른다. 그뒤로 그는 브라질 밖에서 몇편의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전작들이 받았던 것만큼의 호평을 받진 못했다. 다행히도 그는 70년대 후반에 조국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매우 복잡하고 난해한 자신의 마지막 영화 <땅의 나이>(The Age of the Earth, 1980, 160분)를 만들 수 있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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