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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영화제 결산 - 정성일[9]
이다혜 2003-06-07

매우 단순하게 정리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소쿠로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오이디푸스적인 문제로 풀어나가는 것을 거절한다. 차라리 그 둘 사이는 이상하게도 동성애적인 끈으로 칭칭 감겨 있다. <어머니와 아들>에서는 풍경이 중요하다면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육체, 그 살과 뼈가 만들어내는 힘의 형상이 중요해진다. 종종 그 이미지들은 둘 사이에서 뒤엉키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감정적 긴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육체가 서로 분리될 때, 그 상실의 긴장을 소쿠로프는 아버지와 아들의 방과, 그들의 창문 사이로 이어지는 지붕과, 그리고 지상의 땅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종종 이미지들은 여전히 마음대로 휘어지고, 그 굴곡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내면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사유는 이미지의 지도에 있다. 소쿠로프는 페테르부르크와 이스탄불, 그리고 리스본을 한 장소로 가정하고 연출한다. 그래서 유럽을 가로지르는 이 세 도시가 이 영화에서는 단 하나의 마을로 펼쳐지고, 그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안는다. 그것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보는 도시의 풍경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그것은 동시에 유럽과 점점 멀어지는 러시아의 마음이다. 또는 고향에 머무는 아버지의 추억과 유럽으로 옮겨가는 아들의 미래 사이의 간격이다. 그 사이의 틈, 그 틈 사이의 공간들이 만들어내는 거리감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알레고리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작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유럽과 러시아의 대서양 문화적 결별의 상징이자, 과거와 현재의 동성애적인 사랑이자, 동시에 기독교 신화적 비전의 부활이다. 아들은 말한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모든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수난으로 귀결되는 법이지요.” 아버지는 침묵한다. 2천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반지의 제왕> 따위는 잊으시라!

<털스 루퍼 여행가방, 제1장 모아브 이야기>(The Tulse Luper Story, The Moab Story)

감독 피터 그리너웨이, 경쟁부문

인터넷 시대의 루이스 캐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털스 루퍼의 여행가방>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99년 베니스영화제에서였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 프로젝트를 발표하였으며, 아마도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는 회화와 비디오와 영화와 인스톨레이션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모두들 의심했다. 왜냐하면 <필로우 북> ‘이후’ 그의 영화는 요란하기는 하지만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새로운 영화를 마침내 ‘발명’했다. 피터 그리너웨이 자신의 말에 의하면 “(과거의) 영화는 죽었다! (새로운) 영화여, 영원하소서”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삼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 <모아브 이야기>에서 내가 본 것은 전대미문의 미학 안으로 들어간 피터 그리너웨이이다.

이 영화는 미장-인터넷(mise-en-internet)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세계의 첫 번째 영화이며,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화면을 구사하면서 펼쳐지는 모험활극이다. 그러니 CG로 뒤범벅을 만든 따분한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따위는 잊으시라! 혹은 패스트푸드점의 철학자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를 삼분 만에 해치운 당신도 피터 그리너웨이 앞에서는 쩔쩔맬 것이다. 정말 이 영화는 그저 영화관에서 쓰윽 한번 보고는 알 수 없는 영화이다. DVD를 산 다음 수십번을 돌려보아야 할 이미지들의 홍수, 혹은 문자들의 감옥이다.

털스 루퍼의 여행은 1928년 우라늄의 발견으로 시작해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데서 끝난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이 이야기를 삼부작으로 완성할 예정이며, 그 ‘제1장 모아브 이야기’는 다시 9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져 있다. 우선 이 종잡을 수 없는 영화의 줄거리. 수수께끼의 인물 털스 루퍼는 전세계의 16개의 감옥을 오가며 그의 인생을 보냈다. (첫 번째 에피소드) 털스 루퍼의 첫 번째 감옥 체험은 10살 때 아버지에 의해서 웨일스에서 보낸 3시간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그로부터 12년 뒤인 1938년 유타의 모아브에서 친구 마르티노와 사막에서 사라진 몰몬 도시를 찾다가 미국계 독일가족에 의해 붙들린다. 그는 감옥 벽에서 글쓰기를 배우고, 영사기를 발명해서 문학, 연극, 영화. 회화를 감옥 벽에 영사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 2차세계 대전이 발발한 유럽에서 털스 루퍼는 간첩 혐의로 벨기에 파시스트들에게 붙잡힌다. 안트워프 중앙역의 호텔 목욕실에 갇힌 그를 감시하는 두 명의 간수는 (프란츠) 카프카와 (사뮈엘) 베케트일지도 모른다. (네 번째 에피소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털스 루퍼는 보에 있는 성에 보내진다. 여기서 루이 14세 시대가 재현된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 털스 루퍼는 스트라스브루흐에서 그가 상영하는 영화 때문에 유폐된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 털스 루퍼는 디나르 해안에서 잉그르의 그림과 시체를 비교해놓은 임상병리 박물관에 강박관념에 걸린 것처럼 심취한 유대계 여자를 보고 빠져든다. (일곱 번째 에피소드) 털스 루퍼는 리스본으로 가는 배에서 탈출하지만, 거기서 오페라 오락물을 창작하려는 극단에 의해 배 안에 있는 수영장에 다시 갇힌다. (여덟 번째 에피소드) 털스 루퍼는 샤크 섬에 스스로 자원하여 갇혀서 거기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는 거기서 훗날 유럽의 오페라와 연극무대를 번성하게 할 각종 게임과 프로젝트를 발명한다. (마지막 자막)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이 줄거리는 내 생각에 그렇다는 것이고, 당신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정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화면은 하나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두개, 혹은 세개, 때로는 여덟개의 팝업 창이 뜨면서 마치 윈도처럼 진행되기 때문이다. 문자들은 계속 떠오르고,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기록필름과 조작된 가짜 기록필름이 섞이고, 기록 안에 다른 이미지를 숨겨놓기도 했다.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네비게이터는 털스 루퍼의 가방뿐이다. 털스 루퍼의 행방불명된 92개의 여행가방은 모두의 추적의 대상이 된다(그리너웨이의 숫자놀이. 92는 물론 우라늄의 원소번호이다). 그리고 그 여행가방의 일련번호들은 무작위로 등장한다. 그 안에서 피터 그리너웨이는 웹서핑을 하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물론 여기에 주제가 있을 리 없다(당신의 웹서핑이 그러하듯이!). 유희와 퍼즐의 황홀경, 혹은 이미지의 박물관. 20세기를 횡단하면서 고문서를 뒤지듯이 벌어지는 모험의 세계. 즐길 수도 있지만,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반지를 찾으러 다니든지, 여행가방을 찾으러 다니든지 그건 당신 마음이다. 나는 반지를 화산에 던지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 하지만 털스 루퍼의 92개의 여행가방의 행방이 사무치게 궁금하다.

두 거장의 성찰, 상반되고 또한 닮은

<미스틱 리버>(Mystic River)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경쟁부문

<늑대의 시간>(Le Temps du Loup) 감독 미카엘 하네케, 비경쟁 공식초대작

대가들은 영화를 만드는 순간 자기의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 안의 그 무엇인가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만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는 것은 그러한 체험의 과정이다. 그 반대로 미카엘 하네케는 과정을 겪어가면서 체험을 다시 구성하게 만든다. 그 둘은 정반대의 영화를 만들지만,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미스틱 리버>와 <늑대의 시간>이 그들의 최상의 영화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든다. 그것은 미국과 유럽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동시에 일상적 경험의 실체이자 깨어날 수 없는 악몽에 대한 이해의 시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 친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어린 시절 지미와 데이빗, 션은 함께 놀다가 데이빗이 유괴되고,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남긴다. 그들은 어른이 되고, 이제는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지미(숀 펜)의 딸이 강간당하고 살해된 다음이다. 지미는 데이빗(팀 로빈스)을 오해하고, 션(케빈 베이컨)은 사건을 해결해야 할 형사이다. 이스트우드는 이들 사이의 드라마를 풀어내는 대신 그 내면의 상처받은 영혼에 집중한다. 이것은 오해와 증오, 분노,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다면 괴롭지 않을 죄의식의 누적이 가져온 현재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관심은 생략된 시간, 그들의 어린 시절에서 어른에로 점핑해버리면서 ‘(편집되어) 찍지 않은 시간’이 어떻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에 영향을 끼치고 그들로 하여금 비극으로 이끄는가에 관한 성찰이다. 이스트우드는 현재의 시간만으로도 그 빈 시간을 보여준다. 이미 망가져버린 세 사람의 현재는 모래톱처럼 켜켜이 쌓이고, ‘미스틱 리버’는 그들의 시간처럼 유장하게 흐른다. 그 물가에서 지미는 데이빗에 대한 죄의식을 서로의 방법으로 청산한다. 이제 션은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 지를 결정해야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대목에서 미국의 딜레마를 본다.

미카엘 하네케는 세계 안의 시간의 역설을 본다. 주말여행을 떠난 가족은 자신의 별장에 낯선 사람들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다짜고짜 그들에게 총을 들이밀더니 그냥 남편을 쏘아 죽인다. 아내 안나(이자벨 위페르)는 두 아이와 함께 도망치는데, 아무리 달려가도 숲길은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모두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두 모여서 이 숲을 벗어나는 방법은 기차를 타는 것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힘겹게 역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역에 모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미카엘 하네케는 우리의 시간 감각을 교란시킨다. 그래서 숲이라는 이 장소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시간성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동시대라고 생각했던 이 영화는 갑자기 2차 세계대전의 황폐함과도 같은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가까운) 미래의 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섭리가 잠시 멈추고 악마가 유혹하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늑대의 시간’으로 마치 타임 루프처럼 휘청거리면서 빠져든다. 그 안에서 이성의 질서가 중단되고, 세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미카엘 하네케의 세상은 너무나 연약한 것이어서 자칫하면 찢어지는데, 그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또 하나의 세상은 온통 동물적인 야만성과 욕망의 광란에 휩싸이는 위기의 이면이다. 그 둘은 하나로 이어지고, 또는 어느 사이에 그 안으로 들어와 있는 자신을 본다. 이자벨 위페르, 파트리스 셰로(올해 칸 심사위원장), 베아트리체 달, 올리비에 구르메(지난해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에 이르는 수많은 연기자들을 완전히 자기의 폐쇄된 세계 안에 집어넣고 임상심리를 벌이듯이 진행되는 이 음침하고 무시무시한 비전으로 가득 찬 <늑대의 시간>은 우리에게 세상을 의심하라고 선동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어쩌면 여기서 홀로코스트를 볼 것이고, 또는 보스니아를 볼 것이며, 원한다면 이라크를 볼 것이다. 야만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고, 그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여러 개의 세계가 겹쳐져 있는 것이며, 문을 잘못 열면 당신은 이미 그 세상 안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두개의 메시지, 세상에 대한 두개의 이해, 두명의 (서로 다른 의미에서의) 대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고전주의영화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영화의 흐름 안에서 여전히 자아를 배려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시간을 중요시하는 동안, 미카엘 하네케는 모더니즘영화의 마지막 변호인처럼 등장한다(<늑대의 시간>은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처럼 보이는 대목조차 있다). 지금 이 두 사람의 시네아스트의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모순이자, 미국과 유럽 사이의 균열에 대한 방증이다. 결국 세계영화라는 것은 환상이며, 그 반대로 영화 속의 세계는 수없이 나뉘어진 가능성의 모나드일 것이다. 그것이 대가들이 해야 할 영화에 관한 역할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면서) 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고 영화들을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이제 영화는 점점 그 어떤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이행의 시기에 이르렀다는 생각이다. 이제 미장센의 개념은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scene)은 그 어떤 다른 것으로 교체되고, 그 안에서 영화의 미래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이행의 접합이 유럽과 미국영화에서 서로 다른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영화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더할 나위 없이 연극의 전통을 빌리고 있다. 라스 폰 트리에는 가장 빨리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는 그 안에서 가장 멀리 나아가고 있다. <도그빌>은 단지 일시적인 시도가 아니다. 또는 라스 폰 트리어만의 실험이 아니다. 아르노 데플레생의 <‘남자들의 무리들 속에서’를 연출하면서>는 연극과 영화의 교차이다. 물론 그것은 이미 자크 리베트가 한 것이다(<미친 사랑>). 그러나 데플레생은 영화 안에서 그것을 시도하는 대신 연극 안에서 영화를 생각한다. 미카엘 하네케(<늑대의 시간>)와 라울 루이즈(<그날>)에게 영화와 연극의 경계는 모호하다(그들은 영화의 전통보다는 사뮈엘 베케트에게서 훨씬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의 상상력의 출발은 명백히 연극이며, 영화는 그 상상력을 실현하는 프레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무대와 프레임은 다시 검토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프랑수아 오종의 <수영장>조차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가 쓴 희곡을 옮겨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혹은 베르트랑 보넬로의 <티레시아>의 그리스 비극의 무대와도 같은 공간들. 클로드 밀레의 <꼬마 소녀 릴리>는 체호프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것이며, 물론 베르트랑 브리에의 <커틀렛>은 연극의 영화적 버전이다. 그들의 영화는 말 그대로 미장-테아트르(mise-en-theatre)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상상력이 고갈되어가고 있는 지금 연극에 기대는 모습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혹은 고전주의에로의 복귀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 스스로 점점 더 빈곤해지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 안에서 셰익스피어가, 라신이, 체호프가, 브레히트가, 베케트가 새로운 천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내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영화는 벌써 이동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이론은 뒤늦게 도착해서 부검을 실시한다.

하지만 미국영화들은 영화를 점점 더 평면적으로 찍는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이미지의 문제이다. 구스 반 산트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엘리펀트>의 1.33 대 1의 화면은 너무 낯설어서 마치 그것이 영화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을 구스 반 산트는 미학적으로 사용한다. <엘리펀트>의 대부분의 장면들은 일상생활을 우연히 찍은 스틸사진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는 여기서 화면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기분을 담는다. 구태여 이름을 불러야 하다면 그는 여기서 미장-(폴라로이드)-포토(mise-en-‘polaroid’-photo)의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구스 반 산트만의 생각은 아니다. 셔리 버만과 로버트 펄시니의 <아메리칸 스플랜더>는 미장-카툰(mise-en-cartoon)을 활용한다. 또는 선댄스의 수많은 인디영화들. 이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점점 더 SFX를 이용한 버추얼 이미지에 매달리는 동안, 거기에 저항해서 이미지의 리얼리티에 관심을 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디지털 복제의 예술시대에 맞서 기계복제의 예술품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영화가 정말 사진과 같은 효과에 매달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공존의 순간이 있다.

이 정반대의 이행 속에서 아시아의 영화들은 무언가 방향을 붙들지 못한 느낌을 안겨준다. 그들은 자기의 방식으로 나아간다. 가와세 나오미, 구로사와 기요시, 로우예, 린첸생, 유릭와이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지점에 있으며, 그들의 고민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들이 대부분 DV캠을 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카메라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이 서투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행의 시간 속에서 아시아의 영화들이 일제히 드라마-모더니티의 문제에만 ‘여전히’ 매달리고 있는 것은 그들의 영화를 낡은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시아영화는 서구영화의 추억처럼 보일 지경이다!

영화는 다시 한번 점핑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아시아영화가 그들과 함께 한번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세상의 균열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영화의 영년(zero year!)를 선언한 고다르의 말을 창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다르는 말했다. 결국 영화는 세상과 이미지, 그 둘 사이를 연결하는 접속사 ‘과’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영화는 다시 세상 안으로, 혹은 영화 안으로 세상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미 인천공항에 내릴 시간이 되었다. 2003년 칸 보고서는 여기서 중단된다.

추신: 내년 칸에 온다고 결정된 명단. 잉마르 베리만의 신작.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 인터뷰에 의하면 라스 폰 트리에의 두 번째 USA 연작, 그리고 왕가위의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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