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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할게.실은 나 이영화 좋아해,감독들의 커밍아웃 [4]
권은주 2003-06-20

장 진 -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감독

그 지독한 사랑의 라브레타

<러브레터>

Love Letter | 감독 이와이 순지 | 출연 나카야마 미호

이런 고백은 정말 처음이다…. 아무도 모르게 흠모하고 있었던… 영화… 내가 이 영화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말하면… 난 무슨 명분으로 다음 영화들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말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몇몇 영화가 맴돌았다. 어린 시절 눈물 흘리며 성당에서 봤던 <쿼바디스>를 쓰려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질문을 한 사람 이름이 안 떠올라 접었다. <인어공주>를 생각했다가 역시 세바스찬은 기억나는데 인어공주 볼에 아가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생각이 안 나 다시 접고 <박하사탕>을 쓰려니 권력에 기대보려는 수작 같아 다시 포기하고… 심지어는 <살인의 추억>이 떠올랐다가 아직 상영 중이라 막판 마케팅을 하려는 오해를 살 것 같아 맘속으로 삼켰다. 그렇다고 <킬러들의 수다>라고 말했다간 앞으로 이 영화지와는 연락이 두절될 것 같아 차마 못하겠다… 그러던 찰나, 생각이 났다. 조금은 독특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미스터리 추리물 <러브레타>가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미스터리 추리물이란 말 때문에 어떤 영화였더라 고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알고 있는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가 그 <러브레타>가 맞다. 발음이 왜 그래, 라며 러브레터나 러브레러라고 얘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본 사람들은 죄다 러부레따라고 말하더만….

이 영화를 남자주인공의 사인을 주된 시점으로 쫓아가면 미스터리 추리물이란 표현에 공감하게 된다.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는 동명의 후지이 이츠키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어른이 된 뒤 만난다. 하나 그녀와 연인이 되어 잊지 못한 사랑을 묻지 못하고 연장해보려 했지만 똑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이 사랑한 후지이 이츠키는 될 수 없었다. 산행을 갔다가 실족사했다고 영화 안에서 말하고 있는 후지이 이츠키의 심정을 생각하며 나는 그는 결국 자살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달 전 난 후지이 이츠키가 죽은 북해도 산자락엘 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깨달았다. 벚꽃이 만발한 5월, 그 산은 아직도 눈 속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하던 순간을 그 설원 속에서 정지시켰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진정한 ‘러브레타’ 는 그녀의 얼굴을 뒷면에 그려넣은 도서대출증이라는 것을 난 깨닫게 된다. 이 얼마나 독하고 진득한 사랑의 추리인가….

후지이 이츠키는 자신의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지금도 그 산속 눈밭 얼음무덤에 부패되지도 변질되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사랑의 지속이었고…그는 사랑한 채 죽었다. 영화 <러브레타>는 본받고 싶은 선택과 기교 넘치는 암시로 가득한 영화이며 이런 해석 때문에 내가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로 맘속에 묻고 있는 수작이다.

장 항 준 - <라이터를 켜라> 감독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당신의 미래입니다

<썸머 스토리>

A Summer Story | 1988 | 감독 피에스 해가드 | 출연 이모겐 스텁스, 제임스 윌비

어렸을 적엔 우리집이 좀 살았던 것 같다. 동네가 논현동이었고, 비디오가 있었던 걸 보면. 공부엔 별 관심없던 내게 아버지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어느 대학은 얼마고, 어느 대학은 얼마라더라.” 사립대는 얼마고, 국립대는 얼마고 하는 등록금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는 부정입학이라도 해서 아들놈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쨌든, 난 관심없었다. 중절모 쓰고, 바바리 입고, 권총 쏘는 갱영화에 홀딱 반해 있던 때였으니까.

그러던 1988년 겨울, 대입을 앞둔 고3 수험생이었던 난 경찰 아버지를 둔 친구 덕분에 공짜표를 얻어 허리우드극장에 가게 됐다. <썸머 스토리>라. 도통 모르는 배우만 나오는 영국산 멜로영화였다. 시골 처녀와 런던의 한 의대생이 눈이 맞아 야반도주하기로 하는데 결국 남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둘은 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 그렇고 그런 뻔할 뻔자 최루성 신파였다. 미리 털어놓자면, 난 좀처럼 울지 않는다. 아이 때도 동네 사람들이 나 보면 “안 우는 아이 왔나” 그랬을 정도였다. 영화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혀본 적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삼류 멜로영화에 난 맥없이 무너졌다.

나의 꼿꼿함과 오만이 순식간에 무너진 건 엔딩에서였다. 노년에 그 마을을 찾은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건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남자는 멈칫한다. “당신이 서 계신 그곳이 그녀의 무덤입니다.” 서둘러 차를 타고 마을을 떠나는 그는 마을 어귀에서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자신과 닮은 목동을 발견한다. 자신의 혈육이었던 것이다. 목울대가 떨렸고, 가슴이 싸해진 건 그녀가 보여준 영원한 사랑에 감동해서? 아니다. 욕망을 선택하지 못해 빚어진 파국을 뒤늦게 확인하고 당혹해하는 남자에게서 참담한 내 미래의 어느 순간이 보였다. 당시 난 연극영화과로 진학하겠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만큼 용기를 지니고 있지 못했다. <썸머 스토리>를 보고 난 뒤 탄 버스가 중앙극장 앞에서 갑자기 멈춰섰을 때, 내 지지부진한 삶도 또한 종지부를 찍었던 것 같다(혹시 해서 덧붙이는 말인데 난 대학을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갔다!).

정 재 은 - <고양이를 부탁해> 감독

아, 양조위의 소시지 입술이여

<동성서취>

東性西就 | 1992년 | 감독 유진위 | 출연 임청하, 장만옥, 장국영, 양조위, 유가령

영화 <동사서독>과 <동성서취>는 도저히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판이한 성격의 영화다.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고독의 내레이션을 읊조리던 <동사서독>과 동네 야산에서 촬영된 듯한 엎치락뒤치락 코믹무협물 <동성서취>는 여러모로 정반대의 영화다. 그러나 두편의 영화 사이에 묘하게 왕가위가 겹쳐 있다.

영화 <동성서취>는, 왕가위가 <동사서독>을 만들면서 ‘오늘은 뭘 찍을까?’ 결정하는 긴 제작기간 동안, <동사서독>에 출연 중인 배우들과 벌인 일종의 엽기 사기행각이다. 그가 직접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각본을 쓰고 제작기획을 했다. 인물들의 캐릭터는 두 영화 안에서 어떤 부분 겹쳐 있고, 또 어떤 부분은 제멋대로 각각 가버렸다. <동사서독>은 너무 멋지고, <동성서취>는 어처구니가 없다. 몰지각한 인도풍의 세트와 의상들, 유치원 아이마저 눈치챌 만큼 어설픈 와이어 액션과 인물에 대한 엉뚱한 설정들. 진짜로 가소롭게 웃기는 영화다. 그러나 영화 <동성서취>의 각본을 <동사서독>을 만들면서 왕가위가 썼다면 얘기는 자못 달라진다.

넓다!!! 그는 진짜 폭이 아주 넓은 감독인 것이다.

지금 이 시간, 나는 내가 만들 영화 속 인물을 좀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각종 인과성을 부여하고 각(角)이 잡히게 하기 위해 처절하다. 때로는 나의 시나리오 속 인물들이 어쩌면 그렇게 멋진지 스스로 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멋진 세계를 손으로 마구 휘저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걔는 코를 어떻게 파고, 걔의 남다르고 비상한 주접은 무엇일까를 혼자 연구하며 틈틈이 즐거워하고 있기도 하다. 동반되기 어려운 배반의 욕망이란 이런 것이리라….

어떻게 하면 좀더 망가질 수 있을는지, 그리고 얼마나 남다르게 웃길 수 있는가로 권력의 서열을 매겨야 한다면 <동성서취>는 자진납세에 가까운 <개그콘서트>라고나 할까(뭔 소리야 대체…).

사실 이 영화를 사랑해야 하는 모든 이유 중 단연 으뜸은 양조위가 퉁퉁 부은 소시지 입술로 나와서 펼치는 코믹연기에 있다. 나는 그의 소시지 입술을 보며 그와 진정으로 교류했다고 할 수 있다.

주 경 중 - <동승> 감독

어린애들은 이렇게 자란다

<그로잉 업>

Lemon Popsicle | 1979년 | 감독 보아스 데이비존 | 출연 아낫 아츠몬, 사비 골드리히

<팬티 속의 개미> <아메리칸 파이> 시리즈와 한국영화 <몽정기> <색즉시공>의 공통점이 있다면? 웃긴다. 야하다. 유치하다.

모두 고삐리나 청소년들의 섹스에 대한 유치한 환상이다. 골때리는 녀석들의 성적 호기심이다. 10대들의 금지된 섹스를 다룬 영화들의 원조격으로 이미 80년대에 <그로잉 업>이 있었다. 나는 70년대 중반 <고교얄개> 시리즈물과 함께 고교 시절을 보냈지만 섹스를 다루는 수준과 아이디어는 비교가 안 된다. <그로잉 업>은 1979년 이스라엘영화이다.

요즘 보면 내용은 진부하다. 여자 앞에서 내성적인 벤지, 꽃미남 바람둥이 바비, 이들과 어울리지 않지만 이들에게 꼭 있어야 할 뚱보 휴이. 이들 혈기 왕성한 청소년들의 우애와 사랑과 섹스에 눈떠가는 이야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성적인 호기심과 예쁜 여자애이다.

오락장에서 꼬신 여자애들과 무임으로 영화관에 들어갔다 쫓겨나기도 하고, 이웃집 유부녀와 침대에서 뒹굴다가 남편이 나타나 망신을 당한다. 매춘굴에 들어갔다 와서는 세명 모두 성병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당황하기도 한다. 벤지가 좋아하는 니키라는 여자애는 친구인 바비와 사귀는 애절한 삼각관계도 있다. 바람둥이 바비는 니키와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자 그녀를 차버린다. 벤지는 니키를 위해 낙태수술을 도와주고 정성껏 뒷바라지를 한다. 벤지와 니키가 잠시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아지만 니키는 곧 벤지를 떠나 바비에게로 가버린다.

전체적으로 내용도 한번쯤은 어디선가 시도되어왔던 그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로잉 업>은 상큼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들로 가득하다. 섹스를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가려낸 보아스 데이비존 감독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여자들도 10대 사춘기 남자의 성에 대한 환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춘기 사내를 둔 어머니나 남자친구의 성적 호기심이 궁금하다면 이 영화 속에서 상당 부분 해답을 들을 수도 있다. <볼륨을 높여라>가 청소년 자아형성의 과정을 기성세대와의 갈등을 통해 심각하고 치밀하고 그렸다면, <그로잉 업>은 10대 청소년의 원초적인 성을 깔끔하고 산뜻하게 그려냄으로써 이후에 나오는 많은 하이틴물의 또 다른 전형을 보여준다.

<팬티 속의 개미>나 <아메리칸 파이>에 비한다면 다소 진부한 에피소드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이 세상 그 어떤 영화보다 50년대 록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 밥 딜런 등의 음악들이 압권이다. 미리 그런 음악을 염두해 두고 촬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존의 음악을 사용하면서 편집의 흐름과 리듬을 거의 완벽하게 일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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