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2]

4. 트리에는 순수의 서약을 지키고 있는가?

아마도 도그마95가 아니라면 트리에에 대한 논란이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1998년 칸영화제에서 <백치들>과 <셀레브레이션>을 내놓으며 알려진 이 서약은 한때 21세기 영화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서약을 깬 것은 바로 서약의 주창자인 트리에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창작과정에 어떤 제한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 선언을 했지만 다시 도그마의 10계명에 얽매이는 것은 도그마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서약을 위반했다.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지키지 않을 서약을 또 다른 누벨바그의 선언처럼 제시한 이유는 단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닌가? 트리에를 과대평가된 감독으로 평하는 이들이 트리에를 결과(영화)보다 말을 앞세우는 감독이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의 이름 앞에 ‘선동가’, ‘호객꾼’, ‘앞잡이’ 같은 단어가 등장한 배경이다.

그렇다면 트리에의 진심은 어떤 것일까? 그는 언젠가 도그마95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도그마의 10계명을 지키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훨씬 어렵다. 속임수를 쓰는 것은 더 어렵다. 그것이 도그마의 정신이다.(중략) 나는 영화가 종교이기 때문에 좋은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종교로 여기는 그의 관점에서 도그마95는 수도승이 그러하듯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리는 일이다. 영화를 만드는 모든 요소 가운데 일부를 제한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는 도그마의 10계명을 어겼지만 어떤 특정 요소를 제외하고 영화를 만든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트리에가 도그마의 정신까지 버렸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트리에 영화가 극단적인 실험에 매달리는 것도 이런 태도와 관련있다. 트리에처럼 영화를 종교적인 고행으로 여기는 감독이 아니라면 배경이 없는 하나의 무대에서 진행되는 영화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의 지지자들은 종교적 고행을 닮은 트리에의 극단적 실험정신이 새로운 차원의 영화로 발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트리에 영화가 불러온 논란에는 몇 가지 쟁점이 있지만 그가 뛰어난 솜씨를 가진 감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평론가는 거의 없다. 문제는 지금의 그를 ‘대가’나 ‘거장’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점. 비판자들은 트리에가 오늘날 가장 과대평가된 감독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 디지털혁명이 영화의 미학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 같던 시대 분위기에 편승한 대표적 인물이며 논란거리에 목마른 칸영화제가 발굴한 히트상품이라는 시각이다. 그런 점에서 <도그빌>은 시금석 같은 작품이다. 누군가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것이고 누군가는 “미래의 영화를 봤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둠 속의 댄서>가 그랬듯 <도그빌>은 중립적 입장이 불가능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트리에가 가장 과대평가된 감독인지 알 수 없지만 가장 논쟁적인 감독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트리에 자신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란 신발 속에 들어간 돌멩이처럼 세상을 자극해야 한다고 했는데, <도그빌>은 어떤 자극을 주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영화가 말이 된다는 게 자극이고 도발이다. 그 이상 더한 자극이 어디 있나?” 남동철 namdong@hani.co.kr

왼쪽부터 <백치들>,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의 말, 말, 말

칼 데어도르 드레이어 아마도 <잔다르크의 열정>과 <게르트루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관련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들은 더 아카데믹하고 세련된 것이다. 내게 새로웠던 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 한 여자였다. 드레이어의 모든 영화는 한명의 여자가 중심 캐릭터로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고통을 당한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처음 제목은 <사랑은 어느 곳에나 있다>였다. 그것은 드레이어의 영화에서 게르트루드가 자신의 묘비에 새기길 원했던 문구였는데 프로듀서가 반대했다. 누가 그런 제목을 가진 영화를 보러 오겠냐면서.

종교적 배경 나는 종교적 인간이고 가톨릭 신자이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리를 위해 가톨릭을 믿지는 않는다. 부모님이 확신을 가진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나 스스로는 종교적 공동체에 소속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엔 종교를 장난처럼 여기며 접근했다. 당신도 어린 시절엔 좀더 극단적인 종교를 찾아다녔을지 모른다. 금욕적이고 엄격한. 난 사물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드레이어 같은 시각을 갖고 있다. 드레이어의 종교적 관점은 휴머니즘의 정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영화에서 종교를 고발했지만 신을 모욕하진 않았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도 다르지 않다.

핸드헬드 카메라 <킹덤>의 경험에서 시작된 일이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는 관습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사실적인 형식을 가미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다큐멘터리 터치가 필요했다. 만약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관습적인 기교로 찍었다면 관객은 그 이야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을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전체 영화가 현실화할 수 있다. 이야기를 강조하기위한 스타일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했다. 이야기에 역행하는 스타일을 선택했고 그것은 이야기 자체를 덜 강조하게 만들었다.

도그마 도그마의 모든 법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그마는 성경이나 십계명과 비교할 수 있다. 존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이즘’이 들어가는 모든 단어와 같다. 바로 포기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런 불가능성이 법칙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칙들은 우리가 그것을 따를 수 없다 할지라도 구조적이다. 유대인은 토요일에 전기를 사용할 권리가 없지만 TV를 보기 위해서 법칙을 우회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창의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어둠 속의 댄서> 이 영화는 두 가지 측면을 조합한 것이다. 뮤지컬 장면과 다큐멘터리 같은 장면. 뮤지컬에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가미하면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뮤지털을 전복하거나 파괴하려 한 것은 아니다. 뮤지컬이라는 형식에 대한 존경심으로 시작된 일이다. 난 진정한 감정을 넣음으로써 뮤지컬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감정과 음악이 어울린 아름다운 칵테일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난 심각한 뮤지컬이 흥미로웠다. 진 켈리의 뮤지컬 혹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어느 정도 심각한 면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뮤지컬이 오직 오락으로 기능하기에 뮤지컬에 그보다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그빌>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답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고 말하겠다. 그렇다고 이것이 반(anti)영화라는 말은 아니다. 초기에 나는 매우 영화적인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이것이 너무 쉽게 성취된다는 것이다. 컴퓨터만 있으면 ‘영화적’인 것을 만들 수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산을 넘어 돌진하는 군대와 용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큐브릭이 <배리 린든>을 찍으면서 배경이 되는 산에 적합한 광량을 얻기 위해 두달을 기다려야 했던 그때는 ‘영화적’이란 것이 타당한 말이었다.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꼬마가 컴퓨터로 겨우 2초 만에 이 빛을 채워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예술형식이겠지만 내가 관심있어 할 일은 전혀 아니다. 이런 경우, 난 산을 넘어 진군하는 군대를 보는 게 아니라 “좀더 멋지게 해볼까. 그림자를 더 넣고 색은 좀 빼고…” 이렇게 말하는 어린이를 볼 뿐이다. 그것이 매우 잘 만들어졌더라도 그건 날 전혀 감동시킬 수 없다. 나로선 조작되기를 원치 않는 수준의 조작이 느껴질 것이다.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1]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2]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3]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