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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의 스파이크 리,흑인 `감독`의 5색 스펙트럼 [2]
심영섭(평론가) 2003-08-29

#4 연출- 스코시즈에 대한 흠모와 경쟁

<똑바로 살아라>

스파이크 리, 본명 셀튼 잭슨 리는 1957년 3월20일, 뉴욕이 아닌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창기 영화의 대부분의 영화음악을 맡았던 빌 리가 그의 아버지로, <모 베터 블루스>의 블릭처럼 재즈 뮤지션이었다. 문학 강사인 어머니 역시 그의 정신적 지주로, 애틀랜타 무어하우스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다음, 뉴욕대 영화과 대학원에서 입학하여 마틴 스코시즈의 사사를 받는다. 아마도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스파이크 리에게 가장 많은 영감과 고통을 동시에 선사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스승인 마틴 스코시즈일 것이다. 금속성의 차가운 이기주의자에서 지상으로 추락하여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한 <모 베터 블루스>의 블릭은 역시 펄펄 끓어오르는 인간 백정에서 한 인간이 되었던 <분노의 주먹>과 <뉴욕 뉴욕>의 로버트 드 니로를 연상케 한다. 블릭의 가장 행복한 시절을 조악한 홈무비로 짧게 요약하는 방식이나 이후의 길게 이어지는 그의 추락에 대한 잔인한 시선은 스코시즈의 그것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특히 단수 십분 내에 캐릭터와 이야기를 요약하는 방식은 분명 마티의 냄새가 느껴지는 스파이크의 초절정 내공의 본체이다. 그의 스코시즈에 대한 흠모와 경쟁심은 이후 1999년에 나온 <썸머 오브 샘>에서 절정에 달했다. 1977년 정전과 (바로 3700명이 체포되었던 뉴욕의 정전사태!) 연쇄살인으로 타들어갔던 뉴욕을 배경으로 경찰차의 유리창 너머로 마약과 그룹섹스로 흐느적거리는 뉴욕은 <택시 드라이버>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시선으로 체화된 내장을 드러낸 짐승의 이미지 바로 그것. ‘전 떠도는 영혼처럼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습니다’라고 독백하는 샘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트레비스의 일기처럼 뉴욕의 밤공기를 서늘하게 식히고, 심지어 이를 확증하듯 일종의 사회적 희생양이 된 리치는 그 유명한 트레비스의 인디언 머리를 하고 나타나서는 사람들에게 흠씬 두들겨맞는다(그러니 <썸머 오브 샘>의 마지막 음악이 왜 <뉴욕 뉴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핸드헬드 롱테이크나 틸트 숏 같은 튀는 연출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갈 때도 스파이크 리는 스코시즈보다 훨씬 경쾌하게 한방 날리는 법을 잊지 않는다. <정글 피버>에서 서로 의견이 대립되는 흑인 주인공 플리퍼가 승진을 원하는 장면을 보자. 그는 플리퍼가 승진을 주장할 때는 오른쪽으로 360도 트래킹을 하다, 플리퍼의 백인 상관인 매스트와 코빙턴이 이를 저지할 때는 왼쪽으로 360도 트래킹을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이 두 사람의 충돌이 그저 일회적인 말다툼이 아니라 그들이 나고 자란 전세계의 충돌임을 한번에 보여준다. 특히 마약을 위해 매춘을 하는 흑인 소녀를 가슴에 껴안고 플리퍼가 노!!!!를 길게 외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예 공중에서부터 빠르게 줌인하여 플리퍼의 얼굴을 프리지 프레임하며 정지한다. <클라커즈>에서 경찰의 취조를 당하는 소년의 눈동자에 경찰인 하비 카이틀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줌인되는 것도 정말 오싹하다. 때론 마음속 깊은 분노와 변화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를 때, 그는 아예 그의 전매특허 같은 정면 클로즈업으로 사태를 직시한다. 사실 의 노튼이 읊조리는 Fuck you신은 유대인과 한국인, 이탈리아인 모두에게 욕설을 퍼붓는 <똑바로 살아라>가 그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속사포 같은 언어 성찬이며, 마치 스파이크의 영화가 어느 순간 랩의 느낌과 통하게 하는 역동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향해 난무하는 감정의 파편들은 마치 스파이크가 흑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 외에는 없다고 느끼는 듯 저돌적이고 딴청 피울 여유를 주지 않는다.

#5 두 번째 시도- ‘흑인’감독 아닌 흑인 ‘감독’되기

잘 알다시피 스파이크 리는 미국 영화 역사상 흑인의 일상을 그대로 담은 최초의 흑인감독으로 감독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버스를 타라>에서 흑인을 다루는 할리우드의 방식을 호되게 비판한다. ‘할리우드는 흑인을 잘못 알고 있어. 그들은 우리를 네 단어로 요약하지. 범죄, 강간, 강탈, 폭동.’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와 아일랜드 이민자의 입을 통해 흑인을 비판한 감독이며, 생생한 흑인의 언어로 콩이 먹기 싫어 토하는 흑인 소년과 이기적이지만 지적이고 당당하게 자기 직업을 지닌 흑인들과 수다떠는 늙은 흑인들, 게이 흑인들, 이슬람을 믿는 흑인들 같은 거대 모자이크를 통해 또 다른 뉴욕을 완성시켰다. 이제까지 백인과의 상대적 위치에서 흑인을 두고 생각해온 많은 영화와 달리 스파이크는 <버스를 타라>에서는 워싱턴으로 백만인 행진을 떠나는 다양한 흑인들을 통해 흑인의 다양성을 ‘점박이 올빼미’로 비유한다(점박이 올빼미, spotted owl은 그들이 탄 버스의 이름이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노예사슬에서 시작한 영화는 ‘혼혈도 흑인인가?’, ‘공화단원도 흑인인가?’ 심지어 ‘흑인과 잔 여자도 흑인인가?’ 등등의 질문을 통해 세상의 모든 핍박받는 사람들은 흑인이라는 그 다양성의 힘을 끌어안고 워싱턴을 향해 나아간다. 이렇게 스파이크 리가 그려낸 세상은 미국 하부문화의 진경산수화인 동시에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향해 지향하는,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한 감독의 사회정치적 비평서이기도 한 것이다.

<말콤 X>

<클라커즈>

그런 그도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기면서 ‘흑인’감독이 아니라 흑인‘감독’이 되려하는 두 번째 시도를 다시 한번 시작한다. 는 개인적으로 <클라커즈>와 함께 그의 최고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빼어난 기량이 돋보이는 스파이크 리의 역작이다. 카메라에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보였던 많은 스파이크의 주인공과 달리 의 주인공들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관계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정글 피버>에서 할렘은 할렘, 벤슨 허스트는 벤슨 허스트(뉴욕의 이탈리아인들의 집단 주거지, <정글 피버>의 백인 여자주인공이 사는 동네)라며, 이 둘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을 공언했던 스파이크 리는 이제 맨해튼에서 뉴욕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저는 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어요. 저는 뉴요커입니다. 저는 미국인입니다. 저는 세계인입니다. 저는 여기서 살았고, 여기서 자랐고 그러니 여기가 고향입니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걸 우리가 성찰하지 못한다면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썸머 오브 샘>이 그랬듯 뉴욕의 가장 지독한 환부에서, 스파이크 리는 ‘그 일은 일어났었다’며 우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아마도 의 진정한 주인공은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력과 함께 우디 앨런의 공간으로까지 확장한 스파이크 리의 뉴욕일 것 같다. 그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가장 훌륭한 스파이크 리의 영화들, <클라커즈>나 <버스를 타라> 모두에 뼈아픈 회상장면이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는 9·11 테러에 대한 스파이크 리가 느꼈던 미래를 바꿀 수 있었던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다. 아무튼 <똑바로 살아라>와 <썸머 오브 샘>까지 너무도 오랫동안 스파이크는 말콤X냐 마틴 루터 킹이냐 Love냐 Hate냐 사이에서 방황했었다(<똑바로 살아라>에서 스파이크가 분한 무키는 증오(Hate)를 외치며 피자 가게에 드럼통을 던진다). 그러나 에 와서 그토록 모든 것에 저주를 퍼붓던 몬티는 감옥에 가는 마지막, 차창을 보며 자신이 욕설을 퍼부었던 모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아마도 그것은 오랫동안 이 살벌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도시를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하던 한 감독의 화해의 악수. ‘흑인들이 물을 먹을 수 없다면, 그 물 기운이라도 맛보게 하소서’라던 <버스를 타라>의 한 늙은 흑인의 기도대로, 마틴 스코시즈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큰소리쳤던 한 청년감독은 이제 로, 그 물가의 가장자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 같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 의 스파이크 리,흑인 `감독`의 5색 스펙트럼 [1]

▶ 의 스파이크 리,흑인 `감독`의 5색 스펙트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