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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이끄는 차세대 여성 프로듀서 - 김선아,류진옥 [2]
박혜명 2003-09-05

지브리 같은 회사 세우리라

| 김선아 |

1995년 <돈을 갖고 튀어라> | 1996년 <깡패수업> | 1997년 <모텔 선인장> | 1999년 <유령>2001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2001년 <봄날은 간다> | 2003년 <지구를 지켜라!>

| 프로듀서의 길

“운이 좋았다.” 여성 프로듀서 중에선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면서도 7편이라는 무시 못할 숫자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김선아(33) 프로듀서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대학 시절 막연하게 영화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시네마테크 ‘영화공간 1895’에서 영화에 관한 이런저런 강좌를 듣고 있었다. 사무실이 마포에서 혜화동 구석으로 이사를 했을 때 그는 위층에 영화기획사가 입주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그 회사 직원들과 안면을 트게 됐다. 얼마 뒤 아예 취직을 하게 된 그 회사는 첫 기획작품인 <결혼 이야기>를 준비하던 신씨네였다. 물론 이런 행운의 이면에는 대학 시절 서울 변두리 재개봉관을 돌며 적게는 2편, 많게는 6편씩 ‘2본 동시개봉 영화’를 두로 섭렵한 경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맡았던 일은 <결혼 이야기> 홍보. 당시 프리랜서로 마케팅을 책임졌던 심재명씨 아래서 기본을 닦았지만 “기자와 지내는 게 영 불편했던” 그는 홍보쪽이 자신의 적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스터 맘마>의 홍보를 맡으라는 회사의 명령을 거부한 뒤 다음 작품인 <백한번째 프로포즈>의 제작부로 들어간 것도 같은 맥락. “순전히 몸으로 때우고 돈계산하고 그런 일이었지만 재밌더라구요.” <결혼 이야기2>에서 제작부장 일을 하고 신씨네를 그만둔 그는 LIM이란 영화사에서 영화 몇편이 엎어지는 것을 경험한 뒤, <백한번째…> 당시 프로듀서였던 차승재씨의 신생 제작사 우노필름(현 싸이더스)에 입사해 본격적인 프로듀서의 길을 걷는다. 우노의 창립작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프로듀서로 데뷔한 그는 김상진, 박기용, 민병천, 박흥식, 허진호, 장준환 등 당대의 만만치 않은 고수 감독들과 호흡을 맞추며 유독 개성이 강한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 프로듀서의 시련

<모텔 선인장>을 개봉한 뒤인 97년, 그는 차승재 대표와 사무실뿐 아니라 집에서도 유효한 ‘동업자’ 관계를 맺게 된다. “제작자의 부인이라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나는 프로듀서일 뿐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가 이뤄낸 성과는 대부분 스스로 일궈낸 것들이다. 일본 현지에서 ‘맨땅에 헤딩’격으로 촬영을 진행한 <깡패수업>이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일보 전진을 이뤄낸 <유령>,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발하고 발랄한 <지구를 지켜라!> 등은 감독의 세계를 철저히 존중하는 가운데 프로덕션을 단단하게 꾸리는 김선아 PD의 존재가 없었다면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 아내가 아니었으면 진작 회사를 차려서 나보다 더 성공했을지 모른다”는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의 말은 과찬이 아닌 셈이다.

물론 7편을 제작한 중견 프로듀서라고 해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감독님들이 생각하는 작품의 방향에 동조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왔는데, 지금은 대중적 소구점을 명확히 하는 게 PD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그의 이야기는 분명 <지구를 지켜라!>의 상업적 실패와 관련이 깊다. 아직도 완성작처럼 감독의 의도를 충분히 살려주는 게 나았는지, 미술쪽을 과감히 포기하더라도 저예산으로 가는 게 나았는지 곱씹어보곤 하는 것도 <지구…>의 교훈을 찾으려는 데서 비롯됐을 터. 게다가 <살인의 추억>이 대성공을 거두지 않았다면, <지구…>의 실패로 회사가 휘청거릴 수도 있었기에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지금 생각으론 다시 선택할 기회가 오더라도 감독의 뜻을 살려주는 쪽을 선택할 거예요. 물론 상업적 소구점을 찾아보려 애쓰겠지만. 만족스런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요.”

| 프로듀서의 꿈

김선아 PD는 며칠 전 준비 중인 <역도산>의 타이틀 롤인 역도산을 꿈에서 만난 뒤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동안 영화에 대해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꿈속에서 보니까 귀엽더라구요. 주인공이 예쁘게 보이면 프로젝트의 단점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 순제작비 70억원 중 절반 정도를 일본에서 끌어오기 위해 동해를 부리나케 건너고 있는 그는 <깡패수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숙한 한·일 합작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내년 2월 크랭크인을 목표로 송해성 감독과는 5월부터 팀워크를 맞추고 있는 단계. “미래? 언젠가는 오래 함께할 감독을 만나 지브리 스튜디오 같기도 하고 워킹 타이틀 같기도 한 자그맣고 알찬 회사를 꾸미고 싶어요.” 만약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수오 마사유키 감독 같은 파트너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일생일대의 행운이 될 것이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동성애를 명쾌하게 풀고 싶다

| 류진옥 |

2002년 <H>

| 프로듀서의 길

류진옥(35)씨가 PD로서 크레딧에 오른 영화는 <H> 단 한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영화계 경력은 본인 표현으로 “운좋은”, 관찰자의 표현으로 “믿을 수 없는” 출발로 시작됐다. 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제작실장을 맡기 전까지 그는 <우연한 여행>(1994)의 제작부 막내를 거쳤을 뿐이다. 영화를 전공하지도 따로 공부하지도 않았으니 이 간극을 설명할 길은 없다. 유일한 해석의 끈이 있다면 이 두편이 모두 기획시대 작품이고, 그는 93년 기획시대에서 단기과정으로 만들었던 ‘영화기획 워크숍’ 프로그램의 수료자라는 것 정도. 류진옥씨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도 영화를 별로 가까이 한 적이 없다. 졸업을 앞두고 대중적인 문화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구와 갈증을 느꼈고 그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영화분야를 점찍은 것이 현재에 이르게 된 시초다. “영화를 통해 내가 가진 시각을 실현해보고 싶다”는 심지 하나만 분명하게 세우고, 그는 기획시대의 워크숍 프로그램에 지원해 합격했다.

프로그램 수료 뒤 함께 수강했던 7명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혼자만 기획시대에 남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건은 생각보다 간단히 이뤄졌다. 아직 때가 이르다며, 혹은 돈이 안 되는 영화라며, 이 영화의 제작 여부를 두고 사내 의견이 분분할 때 “이 영화 하게 되면 누가 할래?”라는 질문에 “제가 할게요!” 하고 손을 번쩍 들었던 게 전부다. “만든다는 거 자체가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이 많은 스탭들과의 작업은 힘들지 않았다. 박광수 감독은 물론이고, 유영길 촬영감독, 이영길 동시녹음기사 등 영화계의 원로들에게 도움을 받아가며 실질적인 것들을 “많이 배웠다”. <…전태일>을 정리하면서 그는 기획시대가 씨네2000과 통합되려는 시점에 퇴사했다. “회사가 커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부담감이었다. 경력에 비해 아주 일찍 독립하게 된 그는 이후 <세친구>와 <나쁜 영화> 두편에서 프리랜서 제작실장으로 일했다.

| 프로듀서의 시련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나쁜 영화>를 끝낸 뒤 그는 혼자 여행도 다니며 쉬었다가 다시 의욕을 냈다. 99년,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전해주기 위해 이미연 PD를 찾아갔던 그는 <반칙왕> 시나리오와 영화사 봄의 입사를 겸한 제작실장 일을 제안받았다. “초반엔 많이 어색했어요. 그 전에 내가 했던 영화들은 전부 진지하고 심각했는데 이 영화에선 반칙기술 가지고 연출부 회의를 하고 <이나중 탁구부> 같은 만화들을 보고 그랬으니까.” 어쨌든 나름대로 작업하는 즐거움을 맛본 뒤 <반칙왕> 개봉 즈음 받은 게 <H> 시나리오다. “프로듀서란 타이틀을 단 건 이게 처음이지만 작업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PD 입봉작이 3년 가까이 제작기간을 끄는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캐스팅이 안 되는 게 제일 문제가 컸죠. 캐스팅이 자꾸 딜레이되니까 중간에 다른 작품을 할까도 했는데, 감독님이 작품에 대한 애정을 털어내지 못해서 저도 같이 있게 됐어요.” 어렵사리 캐스팅이 이루어진 뒤에도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초반에 합류했던 외국인 촬영감독 피터 그레이와 다른 스탭들간에 균열이 생긴 것. 기본적으로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할 수 없었다. 불편한 상황 속에서 일정은 계속 지연됐고, 비상사태로 돌입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땐 애초 계획보다 50% 정도 일정이 늘어난 상태였다. “어딘가에 칼질을 해야 했어요.” 촬영감독이 교체된 뒤 그는 촬영부가 무진장 고생이 많았다고 말한다. “나머지 촬영분량 50%를 20∼30%의 촬영기간 내에 찍으라고 하니까 힘들죠.”

| 프로듀서의 꿈

류진옥씨는 지난 12월 영화사 봄을 퇴사하고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섰다. 그는 감독이나 제작자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마음맞는 감독과 그 아이템에 동의하는 제작자만 있어준다면 계속 PD로 남을 생각이다. “영화판이 점점 좁아져간다는 생각을 해요. 코미디 아니면 안 한다고 말들 많이 하잖아요. 한국영화의 대중성이나 관객점유율이 높아진 건 분명하지만 지금은 밑바닥 좁은 기둥이 높게만 올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는 이 기둥의 저변을 확대하는 쪽에 기여하고 싶어한다. PD로서 감독이 지향하는 바를 존중하고 지원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동성애영화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재미있게. 정면으로 맞부닥쳐 명쾌하게 풀어내는 거죠.” 지금은 이른바 웰메이드라고 불리는, 영화 자체에 재미가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편에 있지만, 10년 전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의 심지는 여전히 곧은 셈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비해 내가 한 게 없으니까 부끄러운 거죠. 망해먹은 PD인데. (웃음) 그래도 평생 운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글 박혜명 na_mee@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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