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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ef 3인의 못 말리는 제작기 [1]
이영진 2003-09-05

판타스틱 영화제작백서

<Show Me> 디지털 단편 프로젝트로 돌아온 임창재, 남기웅, 임필성 감독의 고군분투 제작기

여정의 고됨을 길고 짧음으로 가를 순 없다. 장편을 만드는 것만큼 단편을 만드는 일도 녹록지 않으니까. 이건 초보뿐 아니라 베테랑에게도 해당된다. 실험영화를 만들어오다 지난해 <하얀방>으로 충무로 신고식을 치른 임창재 감독,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로 독립영화계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이어 장편 <우렁각시>를 만들었던 남기웅 감독, <소년기> <베이비> 등의 단편에서 일찌감치 재능을 폈고, 현재 장편 <남극일기>를 준비하고 있는 임필성 감독. 어쨌건 단편영화에 한동안 거리를 두고 있던 서로 다른 개성의 세 감독들도 올 여름 산통을 겪어야 했다.

지난 8월26일 세네프영화제에서 상영된 옴니버스영화 <Show Me>는 세 감독이 낳은 자식인 셈이다. 세네프영화제의 지원으로 가능해진 이번 프로젝트의 애초 컨셉은 서울의 이미지였으나 올해 영화제 모토가 ‘Back to the Origin’이었던 것을 감안하여 설화(說話)로 변경됐다. 설화를 메타포로 현대도시의 우화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바뀐 것이다. 이 커다란 주제의 반경 아래서 각기 다른 스타일을 견지해온 3명의 감독이 <멀고 가까운> <준비된 악당은 속도가 다르다> <모빌> 등 각각 30분 내외의 단편을 만들었고 이를 묶어냈다. 총제작비는 1억5천만원.

3월부터 감독 섭외에 들어갔지만 프로젝트 진행은 더딘 편이었다. 3명의 감독을 최종 확정한 때가 5월 들어서였다.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갔지만, 장마로 인해 일정은 상당기간 지연됐다. 영화제가 다가오자 개별 프로젝트를 영화제에 맞춰 상영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해졌다. 결국 8월23일 상영에선 임필성 감독의 <모빌>을 제외한 2편만이 상영됐고, 26일에도 상영시간을 20분 늦추어서야 관객을 마주할 수 있었다(상영을 앞두고 세 감독 모두 철야투쟁을 한 탓에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눈은 풀려 있었다). 감독들로선 상영 내내 색보정이나 사운드 작업이 미진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8월26일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극장 시네마 오즈에 모인 영화인들의 관심은 기대 이상으로 높았다. 봉준호 감독, 유영식 감독, 김성제 프로듀서,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영화인들의 발걸음뿐만 아니라 영화제를 찾은 일반 관객의 호응까지 겹쳐 상영관 주위는 어지러이 북적였다. 설화라는 창을 통해 현대사회를 반추한다는 공통의 테마도 흥미로웠지만, 호러판타지, 코믹판타지, 에로틱판타지 등으로 이름붙인 상상의 지형도가 세명의 감독들의 손끝에서 어떻게 나왔을지, 그건 서로 어떻게 다를지 비교 음미해보는 것도 못잖은 재미를 던져줬기 때문이다.

현재 <Show Me>는 제작을 맡은 시월시네마가 2004년 초쯤 극장 개봉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풍문을 듣고 ‘내게도 보여줘!’라고 아우성치는 이들은 하는 수 없이 반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아쉬움을 달래고 싶다면 캐스팅부터 후반작업까지 한달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감독들의 고군분투 제작기를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영화제 폐막식이 열리던 8월27일 늦은 저녁, <씨네21>은 세 감독으로부터(큰형인 임창재 감독은 우리 현장은 별일없었다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고, 잠재 관객을 달랠 먹을거리로 서둘러 진상한다.

누가 이 캐스팅을 단편‘급’이라 했나?!

# 단편영화 캐스팅은 더욱 어렵다. 1지망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렇다고 캐릭터에 부합한 이미지에 연기력을 겸비하기까지 한 신인배우를 한눈에 발견하기가 어디 쉽나. 그런데도 이번 프로젝트는 좀 남다르다. 충무로에서 바쁜 유명한 배우들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임필성 감독의 영화에는 박해일이, 남기웅 감독의 영화에는 기주봉이 나오는 것이다. 분명 사연이 없을 리 없다.

남기웅 깜짝 캐스팅? 당연 캐스팅

반대가 극심했다. 남기웅 감독의 제안에 스탭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강력계 형사, 군인, 보스 등을 단골로 맡아온 기주봉 선생이 건태 역을 맡다니. 게다가 건태는 20대 아닌가. 남 감독은 오히려 그게 더 재밌다고 여겼다. 기주봉 선생이 교복을 입고 나온다,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오지 않나. 도깨비 방망이를 얻기 위해 설화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주인공에 다른 배우를 생각해본 적 없었던 남 감독은 집요한 설득이 먹히지 않으면 밀어붙이기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고집을 부린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주봉 선생이 나오면 다들 악당이라고 여기겠지만 그 추측을 배반하는 구조가 재밌었고, 그분이야말로 이야기의 끝을 예상할 수 없게끔 만들어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전작인 <우렁각시>에서도 똘아이 용백으로 나왔으니 처음도 아니고, 기주봉 선생 또한 흔쾌히 허락할 것 같았다. 연락을 드린 날, 기주봉 선생은 출연하겠다면서도 말꼬리에 우려를 슬쩍 얹었다. “내 나이하고 건태 나이하고 너무 차이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일랑 마십쇼.” “하여간 남 감독한테만 가면 내가 망가진다니까. 허허.”

<Show Me> 中 임필성 감독의 <모빌>

임필성 박해일을 잡아라!

돌이켜보면 임필성 감독에게 4월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4년을 꼬박 프리 프로덕션에 바친 장편 시나리오가 제작사가 바뀌고 크랭크인 시점이 1년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아는 독립영화인들에게 직접 전화 걸어 “홍보물이라도 찍게 해달라”고 했을까. 안철호 총괄 프로듀서로부터 프로젝트 제의를 받았을 때 냉큼 손을 내민 것도 그래서였다. 컨셉에 맞춰 단편 시나리오를 쓰긴 했는데, 이번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길어졌다. 장편 시나리오를 20번 넘게 고치다보니 생긴 버릇 같았다. 다른 감독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3일 동안 매달린 끝에 압축 버전을 간신히 만들었다. 이제 캐스팅. 임필성 감독은 여기서 또 한번 주저했다. 토막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으로 박해일을 염두에 뒀는데 속된 말로 너무 떠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살인의 추억> 현장에 놀러가서 두어번 인사 나눈 것이 전부였으니. 지금 만나준다 해도 기억이나 할까. 깨질 걸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배우를 얻으려면. 만나자마자 시나리오와 실제 사건의 전모가 담긴 자료를 건네줬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것 같긴 한데, 해보자라거나 곤란하다거나 별말이 없었다. 기다릴 수밖에. 다행히 박해일은 수일 안에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임 감독은 그때서야 한숨을 돌렸다. 이게 얼마 만인가. 4년 만에 카메라를 잡다니. 박해일이 등장하면서 덩달아 스탭 구성까지 빠른 속도로 진척됐다. 임 감독은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박해일 때문에 여성 스탭들이 몰려들었군.”

<Show Me>의 영화 ① 임필성 감독의 <모빌>

지금의 현실이 미래의 ‘끔찍한’ 설화

synopsis 영민(박해일)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구고야 말 듯한 표정이다. 그러더니 지하철에서 내려 역사의 쓰레기통에 내용물 모를 검은 비닐봉지를 쑤셔넣는다. 주위를 둘러보는 영민은 이내 지하철을 갈아타고 또 다른 역사로 향한다. 두 손이 가벼워졌을 무렵,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잠이 든다. 지하철을 옮겨 타고 다니며 쓰레기통에 검은 비닐봉지를 쑤셔넣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휴대폰으로 전해져오는 부모의 잔소리에 영민은 거의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급기야 욕설을 퍼붓는다.

연출의 변 “스물네살 청년이 부모를 토막살해한 뒤 겪는 공황상태를 그리고 싶었다. 비선형적인 플롯으로 전개되는 건 그런 상황에 처한 인물의 심리가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떤 설화를 비틀기보다 지금의 끔찍한 현실이 미래에 ‘도시 설화’ 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까 하는 데서 출발했다. 점점 더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환경에 둘러싸인 인간들의 비극을 보여주려 했다면 설명이 될까.”

▶ senef 3인의 못 말리는 제작기 [1]

▶ senef 3인의 못 말리는 제작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