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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 기자의 즐거운 베니스 다이어리 [1]

영화제가 365일이라면, 아니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백은하 기자의 즐거운 베니스 다이어리

베니스=글·사진 백은하 lucie@hani.co.kr·취재협조 윤성봉

스쿠터가 있다면 좋을 텐데, <나의 즐거운 일기>의 난니 모레티처럼 좁다란 이탈리아의 골목과 골목을 달려 이곳의 느낌을 단숨에 전달할 수 있다면, 내 발에 바퀴가 달려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이 영화의 계주를 한 트랙도 빠짐없이 달려낼 수 있다면, 하루가 48시간이라 기자회견에서 상영으로 머릿속을 미궁으로 만드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영화제가 365일이라면, 아니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면.

그랬다면 좀더 친절한 일기를 쓸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은 코언 형제의 신작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잔혹함’을 동반한다. 개막전야를 포함해 12일 동안 끊임없이 쏟아져내리는 신작들을 소화불량이 될 만큼 먹어치우고, 차마 곱씹을 틈없이 다시 어두운 상영관으로 발을 옮기는 행위를 일주일째 계속하고 있는 지금, 영화보기의 즐거움은 광기로 변하고 말았다.

여기에 끼어드는 이 죄책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좁게 열린 문틈으로 훔쳐본 수많은 걸작들을 독자들에게 하루빨리 소개하기 위해 카지노 2층 프레스센터에 앉아 있으니, 내가 마치 고약한 중매쟁이가 된 기분이다. 국내에 수입되어 개봉을 기다리는 몇몇 작품을 제외한다면야 올해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140편이 넘는 영화 중에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한국의 관객을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만남을 장담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이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에 대한 인상을 기술하며, 짧은 대화의 기록을 전달하는 이 작업들이 행여 관객에게 불가한 만남의 아쉬움만 증폭시킬까봐, 상사병을 일으키게 될까봐 두려움이 앞선다. 그리고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는 한 개인의 인상이 혹 누군가가 긴 시간을 바쳐 만든 작품에 대한 오해를 낳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우디 앨런의 소심증보다 더 깊이 파고든다. 여기, 베니스에서 보내는 이 7일간의 일기는 그렇게 세상사 걱정 많은 노파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8월27일 수요일 개막일

__ 열네살, 아흔네살. 나이는 달라도…

<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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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

영화제가 열리는 섬 리도에 다다르기 위해선 공공교통수단인 보트, ‘바포레토’를 타야 한다. 20분쯤 뒤에 리도에 도착하니 선글라스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아찔한 햇빛이 떨어진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다시 영화제의 심장부이자 대부분의 메인오피스가 자리잡고 있는 카지노 건물로 가려면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마침내 당도한 이 웅장한 건물 앞은 여기저기서 도착하는 박스들로 가득하다. 오늘은 옮기고, 세우고, 망치질하는 인부들이 관객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영화제의 막이 오르기 전의 무대 뒤는 뜨겁고 활기차다. 본격적으로 영화제를 시작하기 전날이지만 개막전야부터 언론을 위한 몇몇 시사가 진행된다. 14시간이 넘는 비행의 고단함과 시차적응의 틈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베니스에서의 첫 신고식은 ‘사이프러스 산(産)’ <머드>(Mud)(업스트림 부문/ 감독 데르비쉬 자임/ 출연 무스타파 우글루) 마사지로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 훈련장에서 한 남자가 쓰러진다. 사이프러스 북쪽의 직업군인인 알리는 이내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정체불명의 병에 걸린다. 그에게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의사도 알 길이 없다. 알리는 1974년 발발한 내전에서 배에 부상을 입은 전쟁 희생자. 설치미술가인 텔멕 역시 같은 전쟁에서 단순히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아픈 기억을 안고 산다. 그는 자신의 고백을 비디오에 녹화하고 버리기를 반복한다. 어느 날 철책선 근처에서 근무를 서던 알리는 한 무리의 이상한 사람들을 발견한다. 절름발이, 난쟁이, 임신부, 곱사등이로 구성된 이들은 자신의 아픈 몸에 진흙을 바르고 이곳의 진흙이 아픈 곳을 낫게 하는 효험이 있다고 말해준다. 어느 날 알리는 초소 근처에서 우물을 발견하게 되고 우물 속 진흙을 바른 뒤 목소리가 돌아오게 된다.

동지중해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1974년 발발한 내전 이후 터키령과 그리스령으로 분단이 되어 엉성한 철조망을 경계로 북쪽에는 터키계 사람들이, 남쪽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역사는 어딘가 우리와 닮아 있다. “나는 여전히 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이프러스의 현실을 알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는 감독 데르비쉬 자임의 말처럼 영화는 사이프러스에서 일어난 역사를 알리는 데는 그리 부족하진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화의 메타포는 지나치게 얕게 묻혀 너무 자주 표면 위로 그 선연한 구호를 드러내고 말았다.

밤 12시쯤 첫날의 모든 상영이 끝나고 팔라 갈릴레오 극장을 나오니 어느새 베니스는 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낮에 인부들이 뚝딱뚝딱 쉬지 않고 만들어낸 연단은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공사가 끝날 것처럼 보인다. 내일의 태양이 뜨면 11일 동안 저 삭막해 보이는 나무판자 위로 많은 배우와 감독들이 발걸음을 옮기게 되겠지?

♣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수백개의 박스들이 영화제 본부인 리도의 카지노 건물로 도착한다. 개봉박두를 준비하는 영화제.(왼쪽사진)♣ " 야! 발 좀 밟지 말지? " 발디딜 틈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개막식을 보기 위해 팔라초 델 치네마 앞에 구름처럼 모인 관중(오른쪽 사진)

8월26일 화요일

__ 사이프러스 산 진흙으로 신고식하기

“저기요, 전 정확하게 말해 14살 반이에요.” 이번 영화제의 가장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각각 <토킹픽처>와 <광기의 즐거움>이란 영화로 베니스행 초청장을 받아든 1908년생의 노장 마뇰 드 올리베이라와 1988년생 신인 하나 마흐말바프의 ‘80년’이라는 나이차일 것이다.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같은 시대를 호흡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사유와 경험의 폭과 깊이는 다를 지언정 그들 모두 영화 만들기의 ‘광기’에 빠져든 사람들임은 분명하다.

<광기의 즐거움>

<광기의 즐거움>(The Joy of Madness/ 비평가주간 부문/ 감독 하나 마흐말바프/ 출연 사미라 마흐말바프)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막내딸인 하나 마흐말바프가 언니 사미라가 최근작 <Panjeasr>의 촬영을 앞두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을 쫓아가는 다큐멘터리다. 엄마가 만든 <여자가 된 날>에서 스크립터였던 이 소녀는 몇년 뒤 <이모가 아팠던 날>이란 단편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15살에 장편 데뷔작으로 <광기의 즐거움>을 완성시켰다.

“이건 이상한 영화가 아니에요, 포르노가 아니라구요.” 영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설득해 배우로 캐스팅하는 과정은 말 그대로 ‘미친짓’이다. “잘생겼고, 흰수염도 너무 멋있어요.” 한껏 아부를 해가며 설득시킨 할아버지가 돌연 못 찍겠다고 나서자, 다혈질의 사미라는 거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나는 영어도 알겠고, 아랍어도 알겠고, 프랑스어도 알겠는데, 저들은 도통 이해 못하겠어.” 그러나 다음주면 이란에서 20명의 촬영스탭이 건너오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들의 캐스팅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산 넘어 산, “18살이 되었을 때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어요”. 차양을 드리우고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여자주인공 캐스팅은 더욱 난제다. 여자들은 모두 영화작업에 흥미를 보이지만 이내 두려움에 떨며 거절한다. 사미라가 영화를 찍으면 어떤 점이 좋은지에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아도 이들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당신들이 사람을 죽일 거라던데, 영화 찍는 동안 사람을 정말 죽여요?” 그렇게 무지 속에, 몰이해 속에, 어떻게 이 가족이 영화 만들기란 광기어린 작업을 해나가는지를 하나의 카메라는 조용히, 그리고 과장없이 따른다. 그리고 이 가족이 힘겹게 승합차에 오를 때쯤 노래가 흐른다. “똑똑한 사람들, 당신들은 절대로 모르지, 광기의 즐거움을….”

♣ “우뛰… 우뒤… 우디… 그런데 아빠, 우디가 뭐야?” 이 작은 꼬마가 우디 앨런을 알 턱이 있나. 그래도 아빠 덕에 개막작 감독인 ‘우디’를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소년.(왼쪽사진)♣ 영화제 본부인 카지노 앞 계단은 영화제 관객에게 만남의 장이자 가장 편안한 휴식공간이다.(오른쪽사진)

국내에서는 <뽀네뜨>로 알려진 프랑스 감독 자크 드와이옹의 <라자>(Raja/ 베네치아60 경쟁부문/ 감독 자크 드와이옹/ 출연 파스칼 그레고리, 나자크 베살렘)는 사랑에 있어 과연 승자와 패자는 존재하는지를 묻고 있다. 모로코에 사는 부유한 프랑스인 프레드는 일하러온 소녀들과 노닥거리는 게 유일한 낙인 중년의 사내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드의 눈에 모로코 소녀 라자가 눈에 띄게 되고 오로지 그녀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고아에 어린 시절 강간당한 아픈 기억을 가진 라자에겐 ‘돈’과 ‘선물’을 안겨주는 그가 필요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믿을수 없다. 누군가 욕정이 채워지고 나면, 누군가 돈을 취하고 나면, 서로의 곁을 떠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독한 불신 속에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갈망과 질투가 시소를 타는 가운데 급격히 진전되어간다. <라자>는 거의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상황과 별다른 사건의 발발없이도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변화와 헤게모니의 전복과정을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간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불면증이라도 있는 걸까. 공식 시사를 밤 12시에 잡아놓은 것을 보면 이들의 유독 긴 점심시간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그렇게 한밤의 리도에 낯익은 기타선율과 함께 총성이 울린다. 과장된 액션과 의도된 비장미로 똘똘 뭉쳐진 <엘 마리아치> <데스페라도>의 비싼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의 상영이 끝나자 고단한 몸은 작은 침대가 기다리는 숙소로, ‘옛날 옛적 베니스’의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한 골목 속으로 이내 빨려들어갔다.

<잘있어요, 용문객잔> 감독 차이밍량 인터뷰

옛날 극장에 대한 애정 고백

왜 오래된 극장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말레이사아의 쿠칭이란 곳에는 7, 8개 정도의 오래된 극장이 있었다. 그중 ‘오디엔’이란 극장은 1천석도 넘는 대규모에 스크린의 양옆엔 커튼이 달려 있고 천장이 아주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3살 때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극장에 가시곤 했다. 아이들은 나이가 아니라 키에 따라 영화표를 살 자격이 생겼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 키에 상관없이 늘 표를 한장만 샀다. 오디엔의 매표소 남자는(<잘있어요, 용문객잔>의 여자주인공처럼) 다리를 절었고 늘 공짜로 들어가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는데 정말 무서웠다. 요즘엔 이런 극장들은 모두 사라졌다. 집 떠나온 지 20년이 지났지만 나는 가끔 그 영화관 생각을 한다. 그리고 가끔 그 극장들에 대한 꿈을 꾼다. 이상한 일은 꿈속에서 오디엔이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그곳에 있다는 거다. 전작인 <거기 지금 몇시인가?>에 극장신이 몇개 있었데, 내가 살던 영호의 주변에서 느낌이 비슷한 ‘푸호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고 3개월 뒤 그 극장은 문을 닫았다. 나는 극장주인에게 달려갔고 그는 조금 있으면 이 극장이 헐릴 거라고 했다. 나는 그 길로 바로 프로듀서에게 달려가서 극장 빌릴 돈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는 “왜?”라고 물었고 나는 “영화를 찍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호금전의 <용문객잔>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11살에 <용문객잔>을 처음 봤는데 당시 이 영화는 대부분의 기록을 깨며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협녀> 등을 만든 호금전은 내게 있어 최고의 거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용문객잔>을 등장시킨 건 <구멍> <하류>에서 늘 이강생의 아버지로 등장했던 배우 미아오 티엔 때문이다. <용문객잔>은 미아오 티엔의 배우 데뷔작이자 시나리오 슈퍼바이저로 참가한 작품이다. <거기 지금 몇시인가?>에서 미아오 티엔이 죽는데(마지막에 판타지로 등장하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제 내 영화에 안 나오느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다, 그의 영혼은 늘 살아 있다”고 대답했다. <잘있어요, 용문객잔>에 대한 처음 생각은 그저 ‘극장귀신’ 이야기를 만들자는 거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미아오 타엔이 귀신이라면, 그의 데뷔작 <용문객잔>과 함께라면 그가 다시 등장하는 게 아무 문제 없지 않을까, 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 시 준과 미아오 티엔이 35년 만에 낡은 극장에서 다시 조우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시 준은 호금전 영화에서 주로 주인공을 맏은 배우인데 <용문객잔>은, 미아오 티엔처럼, 그에게도 데뷔작이다, 물론 이후 시 준은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고 미아오 티엔은 악역을 주로 맏았다. 35년이 지났지만 이 영화는 여전히 그들의 매력과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 인물들은 거의 대사가 없고,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 지금까지 작품도 그랬지만 거의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롱숏이 이 영화에는 유독 더 많다. 글쎄, 멈출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그냥 계속 찍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때는 내가 “스톱”을 외쳐도 촬영감독이 촬영을 끝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하류> <구멍>에 이어 이 영화에도 비는 멈추지 않는다. 언제쯤 당신의 영화에서 비가 멈추게 될까. 내 영화에서 비는 정말 중요한 요소다. 대만에서는 1년 중 특정기간 동안은 비가 쉬지 않고 내린다. 하도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은 비에 대해 일종의 공포를 가지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나는 비가 너무 좋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어렵지만 그냥 좋다. 내 영화에서 물은 즉 사랑이고, 떨어지는 물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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