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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2]
문석 2003-09-17

#3 영화로 만나기…

올해 2월, 정창화 감독을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발표했을 때, 나는 두 가지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 평소 한국 장르영화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얻기도 한 것이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감독,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장르순위 최하위를 다투는 액션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70년대 쏟아져나온 저예산 액션영화는 우리나라의 영화 암흑기를 대변하는 영화로 취급되었고, 액션영화는 싸구려영화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횡행시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그 가설이 설혹 사실이라 할지라도 정창화라는 감독을 그런 가설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감독은 결국 영화로 승부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

부산영화제 회고전서 9편 상영 결정

그래서 회고전 준비의 첫 단계로 나는 한국영화회고전을 공동주최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찾아낸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정창화 감독은 1953년부터 1977년까지 24년간 모두 53편의 영화를 감독했다. 그는 커다란 편차없이 1년에 두편 이상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 53편의 영화 중 우리나라에 프린트가 남아 있는 영화는 단 14편이며, 이중 3편은 결권이 있는 상태이다(즉, 영화제에서 상영될 수 없다!). 게다가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정창화 감독의 대표작들이 대부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도 <지평선>도 <순간은 영원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암담함을 뚫고 한 가닥 빛이 보였다. 다행히도 남아 있는 그의 영화들이 대부분 액션영화들이고, 그가 시도한 다양한 액션장르들이 편중됨 없이 골고루 그것도 수준작들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고르는 일만 남은 것이다.

1961년 개봉당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노다지>와 태평양전쟁기에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그리고 신성일, 트위스트 김 콤비에 문희가 가세한 청춘액션 <위험한 청춘>까지는 커다란 고민없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사극액션의 대표작을 선정하는 순간 고민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서로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두편의 검객영화 <황혼의 검객>과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을 놓고 고민하던 나는 몇달의 고민 끝에 두편을 모두 선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 정창화 감독의 남아 있는 영화 중 <햇빛 쏟아지는 벌판> 이후 첫 작품인 <노다지>와 한국에서 만든 마지막 작품인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까지가 선정되었다. 문제는 정창화 감독이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홍콩에서 만든 영화가 상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골든 하베스트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이들은 상영 가능한 영화의 테이프를 보내주었고, 골든 하베스트 첫 작품인 <흑야괴객>(The Devil’s Treasure)이 선정되었다. 남은 것은 쇼브러더스와의 문제였다. 쇼브러더스 영화들은 공개가 되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다행히 쇼브러더스 영화의 판권이 셀레스티알 픽처스로 넘어가면서 최근 몇년간 공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셀레스티알 픽처스 역시 순차공개라는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정창화 감독의 영화들은 아직 공개 영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과 <천면마녀>를 가져오기 위해, 홍콩까지 날아가 섭외를 했지만 결국 <천면마녀>를 가져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홍콩판과 한국판을 동시에 상영하게 된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영화의 한국판이 존재하는 이유는 한국 감독과 배우 3명 이상이 참여하면 인가받을 수 있는 당시 합작영화 기준에 의거하여 정창화 감독의 홍콩영화들이 합작영화의 형태로 한국에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편법이다. 왜냐하면 합작영화란 본질적으로 사전에 합의되는 것이지 완성 뒤에 합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편법이 뒤에 영화제에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천면마녀> 이후 만든 쇼브러더스 2호 작품인 <아랑곡>이 <아랑곡의 혈투>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수입된 것이다. 이로써 <아랑곡의 혈투>가 마지막으로 추가되면서 정창화 회고전은 총 9편이 상영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4 드디어 그를 만나다

2003년 8월8일 새벽 4시30분 인천국제공항. 운전도 할 줄 모르고 새벽에 불러낼 자가용 가진 친구도 없는 나는 평생 최고액의 택시비를 들여 인천공항으로 정창화 감독을 마중나갔다. 젊은 시절 사진 외에 정창화 감독을 본 적이 없는 나는 혼자 게이트를 나오는 76살 고령의 어르신을 상상하며 출구 앞에 서 있었다. 잠시 뒤, 같이 나간 후배(역시 운전할 줄 모르는 그러나 기가 막힌 눈썰미를 가진!)가 “저분 아니에요?”라며 소리쳤다. 그럴 리가, 저분은 겨우 6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하면서도 나는 그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정창화 감독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어설프게 시작했다.

“ 최인규 감독의 가르침을 전수한게 자랑스럽다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엿새라는 짧은 일정 동안 빡빡한 스케줄에 쫓기는 정창화 감독을 수행이라는 명분하에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끊임없이 물어댔다. 내 경험상 원로 감독님들은 모두 얘기보따리이다. 말을 아끼시는 정창화 감독 역시 풀어낼 이야기는 끝이 없다. 가벼운 이야기를 꺼낼 작정으로 골든 하베스트 영화에서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 홍금보 이야기를 꺼내자, 재능있는 스턴트맨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라며 성룡 이야기를 꺼냈다. 대체 성룡에 대해 “영화세트에서 장난치기를 좋아했던 어린 친구”라는 평가를 누구를 통해 들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어디 그뿐이랴. <죽음의 다섯 손가락> 이야기를 하며 이소룡 영화의 미국 상륙에 디딤돌이 된 영화가 아니냐고 운을 띄우자, 그는 이소룡이 죽기 3일 전 그를 만나 다음 작품을 함께하기로 합의했었다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최근 액션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영웅본색> 이야기가 나오자, 너무도 까마득한 후배라 자신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던 오우삼 감독의 데뷔를 도와준 이야기를 해준다(실제로 오우삼 감독의 데뷔작은 태권도가 등장하는 한·홍 합작영화이다).

인터뷰 도중, ‘액션영화의 선구자’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정창화 감독은 “과찬이다” 일축하면서, 자신이 감독생활 중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최인규 감독으로부터 배운 것을 후배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그는 자기 밑에서 영화를 배워 성공한 후배감독을 자랑스러워하고 고마워한다. 여기에 정창화 감독이 “부지런하고 성실해 무척이나 사랑했던” 임권택 감독이 빠질 수 없다. “완벽주의자라서 조감독들을 매섭게 다그쳤던” 정창화 감독은 임권택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유일하게 모셨던 ‘오야붕’”이었다. 두 사람은 30여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나는 임권택 감독을 만난 적이 그리 많지 않지만, 이 자리에서만큼 순수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영화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에 30년이란 세월의 간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5 결론적으로 그는 누구인가....

정창화 감독은 “한번 주저앉아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멜로드라마와 홈드라마의 느린 속도”를 벗어나고 싶었던 “액션감독”이다. “액션영화란 어른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시키는 판타지”라고 정의하는 정창화는 관객의 평가를 가장 두려워했던 감독이었다. 그에게서 흥행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닌 관객의 평가를 나타내는 척도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만난 감독들 중에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흥행감독”이라는 평가를 솔직하게 즐거워하는 유일한 감독이었다. 물론 그 역시 “관객이 극장을 나선 뒤에도 한번쯤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것은 늘 “영화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첫 번째 과업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흥행 감독

장르영화는 판타지의 영역이다. 현실에 대한 의식이나 자각은 그 판타지의 외피 밑에 자리잡는다. 장르영화가 갖는 대중적인 힘은 공식화된 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판타지의 보편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정창화 감독은 장르영화가 갖는 이 독특한 특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 통찰력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시간과 문화의 경계를 초월하여 관객을 사로잡는 원동력일 것이다.

부산 한국영화회고전 코디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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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황혼의 검객>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 “한국액션영화의 전설, 정창화”에서 소개될 영화는 총 9편이다. 그 어느 회고전보다 많은 편수지만, 이번처럼 영화들마다 서로 겹침이 없이 다양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을 것이다.

1961년작 <노다지>는 복합적인 영화이다. 금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영화는 가족멜로(부모-자식간의 갈등), 청춘영화(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사랑), 그리고 필름누아르(뒷골목 밤거리의 삶)가 서로 겹쳐져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미얀마를 배경으로 한 1965년작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핵심어는 ‘미얀마 만들기’이다. 미얀마 로케가 불가능했던 60년대 중반, 정창화는 말레이시아 영사관이 제공하는 홍보자료를 바탕으로 미얀마를 재구성하였다. 아름다운 미얀마의 여성게릴라로 등장하는 김혜정의 유혹적인 모습이 카탈로그 사진 같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울창한 열대림이 열대수를 빌려다 화분째 심고 경기도 광릉에서 촬영된 것이라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키 큰 야자수를 눈여겨보라. 그것은 미술을 담당했던 박석인씨의 작품이다.

정창화 영화에는 종종 반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 전편에서 거리와 공터를 누비며 주먹싸움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청춘액션’ <위험한 청춘>에서 신성일이 연기한 덕택 역시 마찬가지다. 회개할 줄 모르는 청년의 모습은 현대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런 면에서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1968)도 빠질 수 없다. 돈을 위해 살인을 업으로 삼은 냉소적이고 비정한 검객 박장도는 <황혼의 검객>(1967)의 정의를 복원시키기 위해 칼날을 세우는 비장미 넘치는 검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이 두편의 검객영화는 이번 회고전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영화들이다. <황혼의 검객>이 미장센을 내세워 정적인 유려함을 자랑한다면, <나그네 검객>은 검술영화가 가지는 전통적인 과장의 미학- 예를 들어 한칼에 우수수 쓰러지는 악당들과 두 고수가 서로 응시하다 순식간에 승부를 내는 등의- 을 내세우면서 리드미컬한 빠른 편집으로 승부한다. 특히 <나그네 검객>의 경우, 액션연기의 대명사인 박노식과 이대엽의 한판 대결과 지금은 코믹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오지명과 백일섭의 액션연기를 만날 수 있다.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서 만든 영화는 총 3편이 상영된다. 정창화 감독이 쇼브러더스에서 만든 두 번째 작품인 <아랑곡의 혈투>는 정통 무협영화이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스타인 로레이가 정창화 감독과 만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은색과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세련된 컬러와 와이어액션을 이용한 유려한 몸동작을 이용한 액션이 쉴틈없이 전개된다. 쉴틈없는 액션으로는 골든 하베스트에서 만든 1호 작품 <흑야괴객>을 빼놓을 수 없다. 정창화 감독의 최대 강점으로 평가받은 현대 액션물이며, 수상에서 벌어지는 모터보트 액션, 자동차 추격전, 치고받는 몸싸움에서 거침없는 총격전까지 액션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액션을 선보인다.

<황혼의 검객>

<노다지>

마지막으로, 이번 회고전의 간판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미국 개봉당시 전미 흥행 1위를 차지하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선택한 영화사를 빛낸 10편의 영화 중 한편인 이 작품은 당대에는 흥행영화로, 후세에는 무술영화의 고전컬트라는 위치를 차지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72년 12월 <철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고 역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미국에서 파란을 일으킨 다음에도 <철인>이 그 파란의 주인공임을 알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하였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쇼브러더스에서 만들어진 오리지널 홍콩판과 합작영화로 수입된 한국판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액션영화는 우리 영화사에서 가장 긴 명맥을 자랑하면서도 가장 굴곡이 많은 장르였다. 정창화의 작품들은 그 액션영화의 시작을 알리며, 성숙과정을 보여준다. 홍콩으로 넓혀진 그의 작품세계는 우리 영화의 세계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정창화가 이루어낸 한국 액션의 전설을 이제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다.

▶ 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1]

▶ 한국 액션의 전설,정창화를 찾아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