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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3]

영화? 세계의 터무니없음을 드러내는 표현수단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인터뷰

2년 전 인터뷰를 한 뒤, <밝은 미래>와 <도플갱어> 두편을 보았다. 당신의 영화에는 자신의 사상을 다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카리스마> <인간합격> <밝은 미래> 유형과, 장르의 틀을 허물고 부수면서 새로운 지형으로 나아가는 <큐어> <카이로> <도플갱어> 유형이 있는 것 같다. 당신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당신을 창작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 * * 나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자기자신과 영화 자체의 갈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과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영화라는 틀이 서로 어우러져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밝은 미래>는 영화의 역사성보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실감쪽에 좀더 강하게 뿌리를 두고 만들었다. 한편 <도플갱어>는 영화 그 자체에 좀더 깊이 몰입해서 만들었다. 아울러 작가가 살아 있는 실감을 ‘현실’이라고 하고 영화의 역사성을 어떤 의미에서 ‘장르’라고 부른다. 현실과 장르, 작품에 따라서 비율의 차는 있겠지만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영화는 비주류다

이전에 당신은, 일본에서 영화는 비주류라고 말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은 여전한 것 같다. 얼마 전 개봉했던 <춤추는 대수사선2>가 대성공을 거두었어도 그것은 TV의 연장선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런 열악한 상황이 일부 일본 감독들에게는 오히려 독특한 영화를 만들게 하는 조건처럼 보인다. 현재의 상황, 조건이 당신의 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 * * 일본에서 현재 영화는 전혀 메인 미디어가 아니다. 영화를 만들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애니메이션이나 텔레비전에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극명하다. 이런 일본의 상황에서도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인간은, 웬만큼 영화를 좋아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나도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난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만든다. 돈을 벌 목적도 아니고 유명해질 생각도 없다. 이런 감독의 존재를 연명시키고 있는 것이 일본 영화계의 최대의 특징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이익도 명예도 아닌 ‘역사에 남을 걸작’을 만들 날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이로>같은 영화는 마치 유럽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전 당신은 누벨바그 등 유럽영화에 심취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지옥의 경비원> 이후 만든 영화들에서 공포영화에 막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당신이 장르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공포영화에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 * 난 유럽영화도 좋아하지만 할리우드영화도 좋아한다. 그래서 예산이 빠듯한 일본영화로 어떻게 하면 할리우드영화에 버금가는 오락성을 창출할 수 있을까 옛날부터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듭해왔다. 그러던 중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공포영화라고 하는 장르에 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질의 공포는 예산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오락으로 성립한다. 이것은 옛날부터의 영화이론이다.

| 장르가 된 구로자와 기요시

<도플갱어>를 보고는, 당신이 만드는 장르영화는 이제 완전히 ‘구로사와 기요시’만의 것이 되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강령>은 장르의 자장 안에서도 자신만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도플갱어>는 아예 장르의 구조 자체를 바꿔버린다는 느낌이다. 당신은 영화라는 매체에서 어떻게 장르를 활용하는가. * * * 영화의 장르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다. 영화는 대개 100분 정도인데 그건 왜일까? 물론 역사적인 우연이 몇번 거듭되다 보니 그렇게 됐겠지만, 아무래도 장르라고 하는 것은 100분을 법칙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항상 이 100분을 어떻게 구축해갈까 생각한다. <강령>에서는 한개나 두개 정도의 장르를 사용하려고 생각했고 <도플갱어>에서는 사용할 만한 장르는 다 사용해보자는 각오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장르와는 전혀 동떨어진 영화로 만들려고 했던 <밝은 미래>까지도 최종적으로 100분 정도의 길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나 자신한테 문제가 있었나 아니면 영화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밝은 미래>의 마지막은 묘했다. 체 게바라의 티셔츠를 입은 불량스러운 아이들에게 과연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일까? 몇년 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요즘의 일본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래서 흥미롭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 * 물론 젊은이에게는 미래가 있다. 나한테도 있고, 누구라도 나름대로 다 미래가 있다. 이것은 ‘일본의 미래’, ‘한국의 미래’, ‘세계의 미래’라고 하는 것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나는 젊은이들에게만 ‘일본의 미래’를 다 맡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보기엔 우리 기성세대가 이해 못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는 것은 곧 매력적인 것이다. 반대로 이해는 위선이다. 인간이 타인을 애써 무리하게 이해하려고 할 때, 오히려 ‘굴욕’이라든가 ‘굴종’이 작용한다. 나는 그런 게 싫다.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적어도 ‘대등’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 나는 그들을 모른다. 그러나 대화한다.

<밝은 미래>의 해파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지만 보살핌이 필요하고 건드리면 독을 뿜는 존재는 젊은 세대를 말하는 것인가. * * * 그렇다. 해파리는 원래 바다 생물이니까 바다로 돌아가면 되지만, 인간은 젊은이든 그렇지 않든 사회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젊은이들을 ‘반사회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해파리가 아니다. 사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들을 사회 밖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나는 존재를 인정하는 시점에서 출발하고 싶다.

<밝은 미래>에서는 기성시대와 젊은 세대의 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다. 그런 세대간의 대화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 * * 대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젊은이(젊은이뿐 아니라 타인이라면 누구라도)는 내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 그걸 알기 위해서도 대화는 필요하다. 젊은이들이 알고 있은 것을 다 가르쳐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탐색해가면서 결코 이해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런 인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

<도플갱어>의 하야사키를 인공 신체를 연구하는 학자로 설정한 이유는. * * *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단지 트럭으로 옮길 수 있는 것, 그리고 많이 흔들리면 부서지는 것, 그런 기준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다.

<도플갱어>에서 왜 하야사키는 도플갱어를 보고도 죽지 않는 건가. <카이로>에서는 ‘귀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그는 단지 자신의 내면을 본 것뿐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도플갱어는 무엇인가. * * * 마지막에 등장하는 하야사키는 어느 하야사키일까라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을 말하면 줄거리상 하야사키 본인은 이미 죽었다. 분명히 이해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도플갱어는 하야사키한테 살해당했고, 하야사키 자신도 차에 깔려 죽고, 마지막에 두 사람이 제3의 하야사키로 등장한다는 구조이다. 현실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 <도플갱어>, 인간과 세계의 분열

하야사키와 도플갱어가 함께 등장할 때, 화면분할이 빈번하게 쓰인다. 그것은 그들의 상황만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서 점유한 영역을 말하는 것 같다. 화면분할의 의도는 무엇인가. * * * 말한 대로다. 이 영화에서는 하나의 인간이 분열하여, 동시에 그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도 분열을 시작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에서 갈등하고 있는 장면으로서 합성화면을,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장면으로서는 편집에 의해 교체를, 그리고 두 사람의 인간이 두개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는 장면으로서 분할화면을 사용하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서 미국영화에서 유행했던 분할화면을 언젠가는 해보리라고 30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실현된 셈이다.

도플갱어가 죽은 뒤, 그의 존재는 마치 하야사키 안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야사키의 내면에 숨겨진 것이 드러났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야사키가 도플갱어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 * * 하야사키는 모든 걸 깨달은 전혀 별개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그가 손에 넣은 것은 새로운 세계다. 그것은 일명 ‘자유’라는 이름의….

<도플갱어>의 이야기는 불쑥불쑥 튀어드는 사건들로 연결된다. 그건 난데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필요없는’ 장면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예를 들어 하야사키를 쫓던 무라카미는,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트럭에 깔려 죽어버린다. 그들에게 세상이란 불가해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 * *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대답할 지식도 자격도 없다. 그건 모르겠다. 세계는 불가해하고 터무니없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사에 의한 영화만이 이런 터무니없는 세상을 터무니없는 사실 그대로 그릴 수 있는 양질의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 나는 희망을 원하는가?

당신의 영화는 늘 사회에서 이탈하거나 멀어져가는 사람을 그려왔다. <큐어> <카리스마> <카이로>를 지배하는 것은 비관적인 정조다. 그런데 <밝은 미래>와 <도플갱어>의 결말에서는 묘한 희망 같은 것이 엿보인다. 어떤 의미인가. 지금 당신은 비관적인가, 희망적인가. * * * 나는 항상 희망적인 영화를 찍으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의 희망이 사회적 가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때로 인간은 완전히 반사회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절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부자유스러운 상황이 갑자기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도 있다고 생각한다. 전혀 배려없이 행한 행동이 남을 구할 수도 있다. <카이로>까지 나는 ‘사랑과 증오’, ‘사회와 반사회’, ‘자유와 부자유’라고 하는 것을 가능한 한 대등한 가치에 두도록 유념했었다.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는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밝은 미래>부터는 좀더 명확한 ‘사랑’, ‘사회’, ‘자유’의 방향으로 발을 내디디려고 생각한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인지, 9·11 사태를 겪어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내 나이 탓일까.

앞으로 당신이 꼭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무엇인가. * * *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나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은 절대 변경 불가능한 현실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대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지금까지의 나 자신과 영화 그 자체와의 갈등 속에서 작품을 성립시켜왔다. 또 한 가지 요소, 즉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는 요소를 가미하면 어떨까, 한번 실험해보고 싶다.김봉석 lotus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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