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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2]

이타미 주조가 제작한 <스위트 홈>은 할리우드의 SFX팀을 불러들여 할리우드풍의 공포영화를 실험한 영화였지만, ‘상업성과 작가성의 이항대립을 무효화했다’는 평가를 받은 <지옥의 경비원>에서는 어느새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영화를 발견하고 여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큐어>를 통하여 정점에 오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큐어>를 발판으로 하여 <카리스마> <카이로> 등의 걸작들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적인 것들을 만들어낸다. 구로사와의 영화적 특징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는 작가주의와 B급영화의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아니 그것들이 하나의 건축물로서 견고하게 결합되어,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낸다.

“B급영화를 좋아한다고 인정하지만, B급영화에야말로 굉장한 A급이 있다, 이쪽이야말로 A급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정적인 쪽이 좋지 야만적인 것은 싫어한다. 규율이 분명한 것이 좋고, 뒤죽박죽인 것은 싫다. 모럴리스트로서, 악랄하고 엉망진창인 것들에는 익숙하지 않다.… 어쨌든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정한 B급영화 중에서, 호화로운 A급에는 없는 스토익(Stoic)한 혈통 같은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선명하고 스토익한 발상으로 현대의 이야기를 구성하자고 하면 어쩐지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고전과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는 결과가 되고 말아서 언제나 괴롭다. 마음의 밑바닥부터 파괴적인 것을 좋아하는 쪽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해도 이 파괴의 와중에 나도 모르게 한줄기 빛을 넣어버리니까. 그래서 언제나 혼란스럽다.… 이걸 정말 부셔버려도 좋은 것일까, 라고나 할까, 일종의 아나키즘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건 보기엔 재밌지만, 나 자신이 만들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정황이 파괴적인 상황이어도, 절대로 무언가를 부수어야 한다면, 웰메이드로, 모럴리스틱하게, 한마디로 멋지게 하고 싶다는 것이, 나의 희망사항이다. 나는 의외로 순수한 휴머니스트의 면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더라도 네거티브하게는 되지 않는다. 내 영화들이 허무주의적이고, 세계에 대한 절망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고 얘기들을 하지만, 내가 세상을 향해 모두 다 없어져버렷! 하고 말할 때도 분명 나는, 혹은 나와 내 주변 사람만은 살아남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구로사와식 해피엔딩

구로사와 기요시의 진술은 자신의 영화가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를 간결하면서도 적확하게 그려낸다. 구로사와는 고전적인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그것을 어딘가 비틀어버린다. 반대로 폭력과 죽음이 작렬하는 장르영화를 만들면서도, 거기 어딘가에서 종교적인 분위기를 한껏 뿜어낸다. 구로사와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 한 가지의 물음을 던진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완강한 시스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라고. “<큐어>에서는 범죄자가 되고, <카리스마>에서는 미치고, <인간합격>에서는 죽는다.” 하지만 <카이로>에서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카이로>의 주인공이 아직 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캐릭터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단 한 사람, 한 사람만은 살아남는다, 견뎌낸다, 라고 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젊은 사람이 주인공이다. 젊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상상 속에서는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건 청춘영화인 것이다.” 그런 구로사와의 생각은 <해파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지금 구로사와는 어딘가 열려 있는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아니 이전에도 구로사와는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단언했다. 왜인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적이라고.

“지금까지 나는 <큐어>에 대해서도, <카리스마>에 대해서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최후에는 해피엔딩으로 하고 싶었다. 그는 그걸로 행복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엔딩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비참한 엔딩이었다고 한다. 분명 그의 사회적 지위나 가족은 모두 망가져버렸으니까,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비참하다고 볼 수도 있다. <카이로>에서는 누구나 알기는 쉽지 않겠지만, 비참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긍정’을 넣으려고 했다.… 한 사람 만큼은 파괴되지 않고 살아 남았으니까.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모두 희생되긴 했지만.… 한눈에 알기 쉬운 해피엔드라고 하는 것은,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모두 꿈이었다거나, 아아 잘됐다… 하는 일이 되거나. 괴수가 거리를 짓밟아도 사람들 모두가 도움을 받아 살아남고, 나중엔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 하는. 하지만 이건 굉장히 과거지향적인 해피엔드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의 평온함에 기대고 싶지는 않다. 퇴로가 막혀 있다 해도, 절망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도 뭔가 희망을 발견한 순간, 어떻게 하더라도 한 사람만이라도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그 대신 이외의 사람은 모두 희생될 수밖에 없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희망은 그런 퇴행적이지 않고, 미래 지향적인, 대신에 절망적인 희망이다. 어쨌거나 구로사와는 ‘사회나 시스템을 뒤집어 엎어 불태운 다음, 그 다음에 희망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큐어> 이후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종말’을 향하여 움직였다. “도시가 파괴되거나 문명이 붕괴된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는 영화는 굉장히 많다. 내가 한 것은, 만약 마을이 붕괴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아니라, 어떤 드라마를 전개시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파괴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에 흥미가 있는 게 아니라, 결론으로 ‘세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도달하게 되는 것.” 그 지점에서 구로사와는 두 감독을 떠올린다. 빔 벤더스와 토비 후퍼. 전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감독이지만, 구로사와는 “영화의 모습은 전혀 다를지 몰라도,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인간드라마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죽음이라는 관념이 들어가고 결국은 세계를 상대로 싸우다, 자신이 죽거나 세계를 파괴하는.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몇 가지를 덧붙인다면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다카하시 신의 <최종병기 그녀> 같은 작품들도 있다. 애니메이션을 싫어하는 구로사와로서는 별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부산영화제 개막작인 <도플갱어>에서도 구로사와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선과 악은 대립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문명이란 영원한 것도 반드시 이로운 것만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돌출된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야기는 엉뚱하게 흘러간다. <도플갱어>에서 마지막에 존재하는 하야사키는 이미 한번, 혹은 그 이상의 죽음을 거쳐온 존재다. 그가 선택하는 것도, 결국 희망이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원하는 것은 죽음과 직면하고, 그뒤에 선택하는 희망인 것이다. <카이로>에서 살아남는 인간을 그려낸 뒤, 구로사와는 좀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 있는 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일관되게 그려온 죽음과,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인간은 이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글 김봉석 lotusid@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편집 권은주

▶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1]

▶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2]

▶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