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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1]

세상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싶은 모럴리스트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아직까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가 한번도 국내 극장에서 개봉된 적이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결코 낯선 이름이 아니다. 지난번 광주영화제에 초청된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가장 주목할 일본의 영화작가로 구로사와 기요시를 손꼽았다. 최근 몇년간 미이케 다카시와 함께 해외영화제가 가장 선호하는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미 데뷔한 지 20년이 된 ‘중견’감독이다. 국내에도 다양한 경로로 소개된 적이 있다. 2001년 전주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한 적이 있었고, 부산영화제와 부천영화제에서도 몇 작품이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이미 수입되어 있는 <큐어>와 <카이로> <강령>은 좀처럼 대중과 만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어째서일까.

비주류 매체의 비주류 감독

<큐어> <카이로> <강령>의 장르를 굳이 말하자면, 공포영화다. 모두 귀신이 나오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살인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들에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공식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가를 따지고 들어가면 복잡해진다. 구로사와는 장르영화를 만들면서도, 그 장르를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초기작인 <지옥의 경비원>이나 <스위트 홈>은 비교적 장르의 문법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냈지만, <큐어>와 <카이로>에서는 장르 자체를 재구성한다. 공포영화가 아니라,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는 대중과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큐어> <카이로> 등 이미 수입된 구로사와의 영화가 여전히 창고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다. 상업적인 파괴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것이 구로사와 기요시를 작가로 만들고,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만든 힘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이 주변인이라고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가, 일본에서는 ‘비주류’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그렇고, 그가 만드는 영화가 다시 그렇다. 이중의 주변인이라고나 할까. 구로사와의 영화는 장르를 인용하면서도, 그 장르를 일일이 뜯어내고 다시 세운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공포영화이되 공포영화가 아닌 곳으로 나아간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선지피가 화면을 뒤덮는 장면은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중심이 아니다. <큐어>에서는 잔인한 살인장면을, 아주 멀리서 롱숏으로 보여준다. 살인이 벌어진다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의 자극적인 감흥은 배제한다. 그럼에도 그 끔찍함은 그대로 전달된다. 영상 자체의 리얼리티로 승부하는 것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다. <큐어>에는 “영상이 가진 근본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것이 구로사와가 장르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카이로>의 도입부에서 분명하게 귀신을 보여주고, 공포심을 자극한다. 그것은 ‘공포영화’를 보러온 관객을 위한 서비스다. 이것은 공포영화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하지만 <카이로>는 바로 자신의 길로 들어선다. “나 자신이 이른바 호러라고 하는 장르에서 일탈되어 있다는 생각도 있다. 단지, 장르로서의 호러를 조금 좁게 정의하여 유령이 나오고 죽은 자를 다루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테마로 한다면, 이 장르는 중간부터는 싫더라도 관념적인 세계를 향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다. 테마 자체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헤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령이라고 하면 가공의 캐릭터라는 느낌이 들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진짜’(리얼리즘)인 까닭에 이런 종류의 호러영화는 이런 방향을 향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중부터는 장르성(性)을 넘어선 어떤 종류의 관념적인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고급스런 B급 공포영화

그것은 이미 구로사와 기요시의 출발점부터 예고된 사실이다. 장 뤽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장 르누아르 등을 숭배했던 영화광 구로사와 기요시는 8mm 자주제작영화에서 출발하여 1983년 핑크영화로 데뷔했다. ‘명작에 바치는 오마주야말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충성의 증거라고 생각’한 구로사와 기요시는 핑크영화인 <간다천 음란전쟁>과 <도레미파 소녀의 피는 끓는다>를 누벨바그풍의 난해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가 재촬영과 재편집을 거치면서 겨우 완성된 것처럼, 구로사와의 영화는 제작자에게도 대중에게도 쉽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이력은 단지 작가주의만이 아니었다. “영화를 찍는다고 한다면 역시 호러라고 생각했다. 흡혈귀, 드라큘라 등 고다르와도, 70년대 활극영화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발상을 한 거다.

그것밖에는 없었기도 하고. 윗세대들이 만들어온 ‘우울한 연애 이야기’나 ‘고뇌하는 청춘’ 같은 건 정말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간다천 음란전쟁>을 만들기 전 기획안을 냈던 핑크영화의 내용도 호러물이었다. 경찰이 여죄수를 호송해가다가 산속의 한집으로 혼자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고…. 기획안을 받은 제작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정치적인 핑크영화 <간다천 음란전쟁>으로 출발했다. “그 시절 호러를 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이유였다. 80년대 후반인 그 시기에 일본에서 호러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이라는 게, 예를 들면 지금 일본에서 <매트릭스>를 하겠다고 하면 나올 법한 그런 반응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라는 이유만으로 그냥 시작했던 거다.”

▶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1]

▶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2]

▶ 익숙한 이름, 낯선 감독, <도플갱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