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2]

박기형 감독 인터뷰

소통이 단절되는 순간이 바로 두려움의 시작

“제발 호러 전문 감독이라고 쓰지 말아주세요. 다음엔 코미디 하고 싶어요.” 다소 의외지만 박기형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1996년 단편 <과대망상>에서 올해 <아카시아>까지 7년간 어두운 상상력에 짓눌렸던 탓이다. 어쩌면 <아카시아> 이후 한동안은 박기형의 공포영화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욱 오랜 시간 공포영화를 고민했던 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아카시아>는 <여고괴담>의 제목이 될 뻔했다고 들었다. 오래전부터 아카시아에 대한 공포영화적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다. 아카시아에 대한 이미지라고 해야 하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다. 아카시아향이란 게 따로 방향제로 팔 만큼 향기롭고 꽃이 피면 예쁘고. 어릴 때 노래 있었잖나.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그런 식으로, 아련하고 예쁘고 추억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카시아 나무가 일종의 괴담에도 등장한다. 가령 워낙 생명력이 강해서 주변 식물을 고사시킨다든지, 어느 무덤을 팠더니 아카시아 나무뿌리가 관을 뚫고 시체를 옭아매고 있더라, 그래서 집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났었다라든지, 일본에서 우리나라 식물을 고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아카시아 나무를 심었다든지. 어느 하나도 정확한 근거가 있는 얘기는 아닌데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호러영화의 기본개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고괴담>을 할 때도 <여고괴담>이라는 제목이 강하긴 한데 고등학교 시절이 갖는 아련하고 예쁜 기억 이면에 삭막하고 힘들었던 느낌이 표현될 수 있는 것 같아서 <아카시아>라는 제목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카시아>는 배우들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기 속내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고 마지막에 이르기 전까지 감정을 자제해야 한다. 그것은 정말 너무 넘쳐서도 너무 모자라서도 안 되는 미묘한 균형을 표현하는 작업인데 연기를 통제하는 데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어떤 것이었나. 배우들한테 그런 말을 많이 했는데, 표정이 읽히면 안 된다, 당신이 지금 여기서 어떤 상태인지가 상대배우에게 읽히면 안 된다, 그게 극중 인물이 견지할 입장일 수 있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다른 가족에게 읽히지 않게 해야 한다, 라고. 그러면서 긴장이 쌓이고 그러면서 갈림길에 서는 영화라고. 그런데 배우 입장에선 자기가 어떤 심정인지 아는데 그걸 표현하는 걸 최소단위로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어려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안으로 쌓는 연기를 했고 그런 면에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심혜진, 김진근의 캐스팅은 어떻게 결정했나? 심혜진은 오랜만에 주연을 한 영화이고 김진근은 낯선 배우인데. 김진근은 주연급으로는 처음 나오는 배우인데 사적으론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배우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높다는 건 배우로서 기본이지만 <아카시아>에 캐스팅한 데는 ‘인성’(人性)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굉장히 성실한 사람인데 영화에 나오는 성실한 가장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졌다. 그런 성실함이 어떤 사건에 엉켰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다. 보통 때 부드럽고 신사적인데 저 사람, 화를 내면 엄청 무서울 거 같다는 느낌, 섬뜩함이 이 영화에 필요했다. 심혜진은 시나리오 볼 때부터 딱 맞는다는 느낌이 있었고 제작사쪽에서도 미리 얘기가 오간 상태였다. 요즘 영화들 보면 30대 여배우들이 맡을 역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 배우들에게 기회가 많아졌으면 싶다. 배우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의 생명력을 길게 만드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심혜진이라는 배우를 쓸 수 있는 기획이라는 사실이 내가 이 영화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박기형 감독의 영화는 <여고괴담>에서 <아카시아>까지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비판의식을 깔고 있다. <여고괴담>의 학교, 늙은 여우와 미친 개, <비밀>에서 미조의 부모, 원조교제하는 어른 등, 기성세대는 썩어 있고 아이들은 그 속에서 질식당한다. 그렇게 볼 수 있겠다. 일부러 그랬냐고? 글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어떻게 얘기해야 하지? 기성세대라는 게 어떻게 보면 가진 사람, 이룬 사람, 그런 걸 텐데 반감 같은 게 있나보다. 영화를 하면서 뭔가 비판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의무감, 양심, 그런 건지도 모르고. 순수한 영화적 재미만으로 가는 게 태생적으로 자꾸 안 되는 것 같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 당신의 영화들에서 사람들은 진심으로 소통하는 것을 추구한다. <여고괴담>에서 진주가 그랬고 <비밀>에선 텔레파시를 통한 소통이 중요하다. <아카시아>에서는 아이와 나무의 대화를 단절시키려는 데서 문제가 벌어진다. 소통하려는 의지와 그것의 단절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사람끼리 부딪치면서 살아야 하는 거고. 개인적으로도 사람들 만나면 어떻게 소통하지, 걱정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소통이 안 되면 어떻게 되는지 겁나기도 하고.

<여고괴담> <비밀> <아카시아> 세편 모두 피를 뿌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고괴담> 때 피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일화가 떠오르는데 늘 피가 많이 필요한 영화를 찍는다. 피가 흥건한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나.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이 규모가 큰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이 필요했다. 사람과 공간만으로 진행되는 영화가 극적 정점에 이르면, 일종의 이 영화 안에서의 스펙터클로서 화면을 온통 피로 적시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 제한된 틀에서 움직이던 영화가 쫙 펼쳐지는 느낌을 주자면 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뭘까, 하다보면 피가 나오게 된다. 자꾸 그런 그림이 떠오르고 대중영화의 미덕인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호러는 피의 장르’라고 말했는데 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호러가 여러 가지 이미지로 변형되지만 본질적인 것은 피의 이미지가 아닌가.

김지운 감독과 했던 인터뷰를 보니까 스스로 한국적인 공포영화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엔 미국 공포영화와 대비되는 동양적 공포가 무엇인지 고민했다면 얼마 전부터 일본영화와 다른 공포에 대해 궁리가 많다. 일본 공포영화는 동양적 공포의 모범적인 텍스트로 보이는데…. 모르겠다. <큐어>가 정말 잘 만든 공포영화이긴 한데 한국 관객에겐 어떨까, 생각해보면 반반인 것 같다. 왜 그럴까?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하고 너무 정확한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너무 차가운 느낌. 그래서 ‘신파’라는 정서가 어느 정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처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과대망상>을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전문적으로 공포나 스릴러 장르를 찍을 감독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아카시아>까지 장편 세편이 모두 공포영화 혹은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영화였다. 이런 장르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과대망상>에선 느끼지 못했지만 겉으로 공포영화라는 장르로 장식을 하면서도 지금 사회에 대한 비판적 관찰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공포영화 장르를 택한 것은 그냥 테크닉에 대한 관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테크닉을 사용하긴 하지만 앞뒤를 잘 맞추는 쾌감은 사실 찾고 싶지 않다. 난 호러에서 기술보다는 정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호러나 스릴러 장르를 택하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보는 관점 때문인 것 같다. 같은 이야기라도 다르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 계속 호러를 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내 정서가 좀 어두워서일 순 있지만 내 정서가 밝아지면 전혀 다른 장르를 할 수 있을 거다. 달라지지 않겠나? 사실 호러영화 만들면 만드는 재미는 있는데 너무 힘들다. 밝고 신나는 얘기가 아니니까 만드는 내내 밝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별로 없다. 감독 입장에선 시나리오 쓰는 내내, 촬영하는 내내, 편집하는 내내 그런 무드에 젖어 있으니까 그렇게 산다는 게 힘들다. <과대망상> 때부터 7∼8년 그렇게 지내니까 다른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나 코미디처럼 다른 장르에 손을 대고 싶다. 멜로는 <비밀> 때 해봤는데 나한테 멜로 감성은 별로 없구나 싶어서 멜로드라마는 아닌 것 같고. 지금 내가 다른 장르의 영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많이 내서 호러말고 다른 기획이나 시나리오 의뢰가 왔으면 싶다. (웃음)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terran61@hani.co.kr

▶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1]

▶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