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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독의 뮤직비디오 촬영현장 [2] - 장준환
사진 정진환박혜명 2003-10-24

장준환 감독, 그룹 긱스 출신 정재일의 솔로 앨범 뮤직비디오 촬영

" 병구의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이뤄주고 싶었다 "

장준환 감독의 뮤직비디오 현장은 봉준호 감독의 현장과 촬영 시간대가 정반대다. 밤신만 필요로 하는 봉 감독의 현장은 까매진 하늘 아래 부지런을 떨고 동트기가 무섭게 자릴 뜬다. 장준환 감독이 연출하는 뮤직비디오엔 낮신밖에 없다. 사람들은 동터오는 하늘보다 먼저 현장에 나갔다가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햇빛의 끝자락까지 밟은 뒤 촬영을 접는다.

오후 4시인데도 이곳은 춥다. 아침 라디오 기상캐스터도 예견했었다. 10월15일인 오늘은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이 되겠고, 강원도 지역은 영하권을 맴도는 곳도 일부 있겠다고 주의를 내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늦가을 날씨 이상이다. 태백을 지나 31번 국도로 2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강원도 철암의 장성광업소 철암지부. 까만 석탄먼지로 덮인 회흑빛깔 때문인지 주변을 원처럼 두른 산들이 햇빛을 가렸기 때문인지 여기 추위는 유난히 두렵다. 탄차들이 와서 석탄을 쏟아내고 간다는 적탄장에 장준환 감독의 뮤직비디오 <Mother Universe> 촬영팀이 모여 있다. 주섬주섬 장비들을 주워모으기에 해 기울기 시작했다고 오늘 촬영 접나 싶었는데, 찍을 분량이 남았다면서 감독은 다음 촬영 준비에 분주하다.

슛이 들어가기 전 네대의 살수기계가 먼저 주변에 비를 뿌린다. 젖어서 더욱 선명해진 까만 적탄장은 단풍이 들기 시작한 얼룩배기 산들을 배경으로 도드라져 뵌다. 그러나 현장 모니터에 담긴 광경은 온통 남보랏빛이다. 촬영기계가 바꿔놓은 색감에 감탄하는 사이 화면 안으로 작은 소년이 들어온다. 슬레이트 지붕 밑에 쭈그리고 앉은 이 소년은 두눈이 커다랗다. 그 앞에 다가선 누군가는 모자달린 빨간색 긴 망토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그는 이 뮤직비디오의 음악을 만들고 부른 장본인이다. 두 주인공 위로 다시 한번 인공빗물이 떨어지면서 슛 사인이 들려온다.

#80_병구의 비밀 ㅣ 몽타주

탄광, 갱구… 우산을 들고 손을 흔드는 병구와 어머니.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아버지… 그를 덮치는 탄차.

팔이 잘린 아버지, 피를 뿌리며 실려가고… 아버지의 잘린 팔을 들고 따라가는 병구.

활짝 펴지는 여러 가지 색의 꼬마우산들….

(중략)

꼬마우산을 들고 장난하고 있는 병구… 몽둥이를 들고 병구에게 다가가는 아버지.

아버지의 다리를 잡는 어머니… 흩어진 우산 위로 넘어지는 아버지.

아버지 일어서면 아버지의 관자놀이에 꽂혀 있는 파란 꼬마우산.

그리고 아버지의 볼 위로 흐르는 한줄기 붉은 피.

병구를 끌어안고 두려운 모습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머니.

아버지, 꼬마우산을 빼내려고 손가락으로 우산대를 당기면…

활짝 펴지는 파란 꼬마우산.

(후략)

-영화 <지구를 지켜라!> 시나리오 중에서

병구 이야기, 이번엔 해피엔딩

장준환 감독이 만드는 뮤직비디오 <Mother Universe>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뻗어나왔다. 삶의 모든 순간이 곱지 않은 일들로 점철됐던 영화 속의 병구는 비참한 죽음으로 지구에서의 생을 끝냈다. 지구인들을 실험대상으로 삼는 외계인의 계략을 막고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외쳤건만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여자친구 순이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병구는, 장준환 감독이 모든 애정을 쏟아 만든 캐릭터였다. “나에게 많은 것을 준 캐릭터다. <지구를 지켜라!>를 가지고 정말 여러 가지를 겪다보니까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못다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뮤직비디오를 통해서 <지구를 지켜라!>를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영화 속에서 병구는 너무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이번 뮤직비디오는 약간 해피엔딩이다. 병구가 그렇게 힘없이 죽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 상처를 치유하고 뭔가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었나보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도 장준환 감독은 느린 말투 끝에 확신을 싣는 데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Mother Universe>에서 어린 병구는 탄광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큰 상실감을 겪는다. 생전에 아버지가 선물했던 작은 장난감 기타를 갖고 놀며 뮤지션의 꿈을 조금씩 키워오던 병구. 아버지의 죽음으로 망연자실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그의 눈앞에 ‘피의 요정’이 나타난다. 피의 요정은 병구를 행복했던 과거로 데려가주고, 뜻밖의 시간여행에 울고 웃는 사이 병구는 어느덧 건강하게 자라 훌륭한 뮤지션의 꿈을 이루어놓고 있다. 병구 역할을 맡은 아이는 <지구를 지켜라!>에서 어린 병구 역을 맡았던 김영찬. 감독은 초등학교 3학년의 영찬이를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고 칭찬한다.

디렉션을 전달하던 장준환 감독이 영찬이를 “병구”가 아닌 “재일아”라고 부른다. 이것은 <Mother Universe>를 작·편곡하고 노래를 부른 뮤지션 정재일의 이름이다. “이 뮤직비디오가 스토리상 말이 안 되는 게…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 앞에 피의 요정으로 나타나서, 함께 과거여행을 떠나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래서 과거의 자신이 자기 슬픔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창작가가 된다는 거다.” 감독은 음악의 주인공인 정재일을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병구로 치환하면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뮤지션 정재일은 피의 요정으로 등장했다가 훗날 뮤지션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어린 병구/재일의 부모를 연기할 배우들은 박희순문소리. 박희순은 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감독과도 가까운 사이다. 요즘 서울에서 뮤지컬 <그리스> 공연 중이라는 그는 “더블캐스트가 돼 있어서” 이곳까지 몸을 실어올 수 있었다. 문소리 역시 스케줄이 여의치 않았을 법한 캐스트다. 송강호와 함께 출연하는 영화 <효자동 이발사>는 이미 크랭크인했다. 문소리는 “촬영은 다음주부터다. 아줌마다 해서 안 하려고 했는데 애가 예뻐서 한다”며 시원스레 웃더니 중얼거린다. “또 아줌마야, 또. 이발사 아줌마, 광부 아줌마… 인생이 아줌마야, 인생이 아줌마….” 그리곤 한기가 스민 몸을 조이며 옆에 앉은 ‘남편’ 박희순을 흘낏 본다. 하지만 낯을 가려서인지 남편에게선 아무 반응도 없다.

정재일과 장준환은 둘 다 외계인?

정재일의 <Mother Universe>는 가제 상태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뮤직비디오 콘티에 덮인 이 곡은 일단 영어가사를 싣고 있지만 그것도 우리말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오케스트라의 스트링 합주와 가스펠식의 코러스가 슬프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는 이 곡은 굳이 장르를 구분한다면 “팝 오케스트레이션쯤 될 수 있다”는 게 음반기획사 메주뮤직 관계자의 말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정재일은 이적, 정원영, 한상원 등이 만든 밴드 긱스의 베이스주자였다. 82년생인 그는 14살 때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열다섯살에 정원영의 3집 앨범을 시작으로 이은미, 한영애, 이적, 김윤아, 김동률, 봄여름가을겨울 등의 앨범 작업에 참여해왔다. 주로 베이스기타를 맡았지만 건반과 기타, 드럼도 연주했고, 물론 작곡과 프로그래밍에도 참여했다. 지인들의 코멘트를 빌리지 않더라도 정재일이 음악에 관한 범상치 않은 재주를 드러내온 것만은 사실이다. 올 11월에 발매되는 첫 번째 솔로 앨범은 정재일이 전곡을 작·편곡했다. 이번 뮤직비디오는 메주뮤직 이훈탁 대표와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의 친분이 맺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자기 세계가 분명한 두 사람을 연결시켜보면 괜찮겠다는 생각에서 두 대표는 정재일과 장준환의 만남을 주선했다. 장준환 감독은 “얘기를 하다보면 별말없이 긴 얘기 안 하고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지구 사람이 아닌 거 같고, 독특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자기 일에 몰두하는지, 그런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거쳤던 혹은 지금 겪고 있는 과정을 비슷하게 겪은 것 같았다. 그 친구를 통해 내 자신을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실 장준환 감독은 세밀하고 논리적인 묘사로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 존재했을 찌릿한 화학작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신 감독은 “비슷하다”, “교집합”, “이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두 사람이 분명한 공통코드를 가졌음을 말했다. 음반기획사쪽에서 제안한 정재일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감독이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코드를 짧은 순간 외적 현상만으로 제3자가 짚어낸다는 건 물론 무리다. 하지만 얌전히 앉아 촬영을 기다리던 정재일이 “연기가 정말 어려워요. 다 어색하니까요”라고 말할 때는 그 느린 말투나 곧바로 이어지는 웃는 얼굴이 감독과 정말 비슷했다.

<Mother Universe> 뮤직비디오 촬영일정은 총 3일. 현장을 방문한 둘쨋날도 벌써 날이 기울고 있었다. 탄광에서 작업하느라 손이 새카매진 스크립터가 오늘까지 총 20% 정도 촬영을 한 것 같다고 말한다. 내일 하루 동안 나머지 촬영이 다 되겠냐고 물으니까 “아마 힘들겠죠…? 그래서 감독님이 나중에 보충촬영을 하실 거 같아요”라고 대답하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단정적인 어미를 쉽게 쓰지 않는 게 스크립터까지도 감독과 비슷하다. 추위를 견디기도 어려웠지만 현장에서 방해꾼 노릇만 했나 싶은 미안한 마음에 개미만한 목소리로 퇴장 인사를 건네자 한창 정신없을 게 분명한 감독이 덜컥 붙든다. “저, 있잖아요. 콘티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거 저기 가방 안에 있거든요? 스크립터 친구한테 말해서 그거 보고 가세요. 그럼 이해가 훨씬 빠르실 거예요.” 그러고도 결국 직접 가방을 뒤지러온 감독. 병구에 대한 애정이 어떤 것이었을지 더이상 설명은 필요없었다.

(봉준호 감독의 현장에 놀러갔던 장준환 감독. 말 안 듣는 개 때문에 봉준호 감독이 고생하는 사이, 재밌게 수다떨던 장준환 감독이 슬쩍 가버렸다는 게 봉준호 감독의 증언.) “얘기 들은 바로는…, 준호가 골목길을 되게 좋아하잖아요. 어디서 그런 골목길을 찾아냈는지 거기서 찍고 있드만요.”(봉준호 감독이 이제 두 사람 붙이는 일 좀 그만하랬다고, 우리가 덤 앤 더머냐고 되물었다는 말을 전하자)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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