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영화 감독의 뮤직비디오 촬영현장 [1] - 봉준호
사진 정진환박혜명 2003-10-24

또 어떤 희한한 장난을 쳤을까?

올해 부산영평상은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에게 감독상을,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에게 작품상을 각각 수여했다. 상의 기준과 권위에 절대적 신뢰를 표하지는 않더라도 여기엔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로 출발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만큼이나 서로 다른 성향과 연출 스타일을 가졌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른바 ‘웰메이드 상업영화’의 한 예를 보여줬다면 장준환 감독은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고집스러운 자기만의 세계를 자유로운 공기 속에 흩어놓았다. 단순한 구분인지 몰라도 한쪽은 몇수 앞을 내다보는 치밀함과 영리함이, 다른 한쪽은 무던한 성격에도 털어지지 않는 아집이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평상이 봉준호에게 작품상보다는 감독상을, 장준환에게 감독상보다는 작품상을 수여한 것에도 비슷한 시각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두 사람이 얼마 전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각각의 과정은 물론 별개로 진행됐지만 또다시 두 감독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작업 중이라니, 재미있는 사건이고 흔치 않은 우연이다. 한주 간격을 두고 나란히 촬영일정이 잡힌 두편의 뮤직비디오 촬영현장. 그곳의 스케치와 두 감독의 이야기를 실었다.

봉준호 감독, 한영애의 <외로운 가로등> 뮤직비디오 촬영

" 70년대 쌈마이영화 찍는 것 같아 신났다 "

정릉 경국사 옆 주택가는 오래된 작은 집들이 하나의 계단을 골목길처럼 끼고 어깨와 등을 맞댄 채 늘어서 있다. 계단은 좁고 가파른데다 도중에 구부러지고 꺾여 있어 단숨에 오르기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층층을 메운 각종 촬영장비와 소품들. 그러고도 남은 공간엔 스탭과 배우들, 기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이 아담한 계단은 내일 아침 동이 틀 때까지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면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낡은 대문 귀퉁이에 녹슨 뚜껑을 덮은 가로등이 달려 있다. 옆으로 이어진 낮은 담장은 말라붙은 담쟁이덩굴을 아무렇게나 걸쳤고, 이 담장을 배경으로 류승범강혜정의 몸이 붕 떠오르기 시작한다. 느린 상승과 함께 수줍은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두 사람. 바로 그때 류승범을 또렷이 바라보던 강혜정이 웃음을 터뜨린다. 곧이어 류승범의 웃음소리가 섞여들고,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봉준호 감독이 컷사인 대신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래, 웃기면 참지 말고 웃어. 그대로 계속 찍어줄 테니까.”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는 중. 동시녹음이 필요없는 촬영현장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작은 두런거림도 끊이지 않았다. “슛”, “카메라 액션” 같은 구호가 여전히 들려오지만 자의로 집중하지 않으면 언제 촬영이 들어가는지도 알기 어렵다. 이 두런거림과 복잡스러움이 걷히면 또 달라진다고 해도, 오늘만큼은 이 동네가 기분 좋게 들썩이고 있다.

비오는 거리에서/ 외로운 거리에서

울리고 떠나간 그 옛날을/ 내 어이 잊지 못하나

바암도 깊은 이 거리에/ 희미한 가로등이여

사랑에 병든 내 가슴속을/ 너마저 울려주느냐

-<외로운 가로등>, 한영애 솔로 6집 <Behind Time> 수록곡 중에서

이번 뮤직비디오는 한영애씨가 가수생활 28년, 솔로활동 18년 만에 처음으로 갖게 되는 뮤직비디오다. 음반기획사 뮤직웰은 4년 만에 발매된 한영애의 신보를 색다르게 홍보해보자는 생각에서 뮤직비디오를 찍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우현정 대표는 “처음부터 찍을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내부회의 때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서 몇몇 유명한 감독들의 이름을 농담처럼 얘기하다가 정말로 이렇게 찍게 됐다”고 말한다. “어차피 기존의 뮤직비디오 감독들이야 우리한테 관심이 없을 테고…. 마침 김유평 PD가 봉준호 감독과 영화아카데미 선후배 사이라고 해서 연결이 됐다.”

한영애의 <외로운 가로등>은 1934년 황금심이 부른 노래를 리메이크했다. 우아한 스트링과 베이스 라인, 트럼펫 음색으로 새 단장을 한 이 곡은 모던한 블루스풍의 재즈 넘버를 연상시킨다. 이 곡의 매력은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원곡의 트로트 느낌과 세련된 편곡이 묘한 긴장을 일으키는 데서 온다. 봉준호 감독이 “첫번째”, “두번째”하며 명확하게 구분해준 컨셉의 “첫번째”가 이것이다. “우리가 노래방에 가서 트로트를 부를 때의 느낌. 노래에 완전 몰입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야, 우리는 젊은데 이런 노래 부르니까 참 웃기지? 야, 청승떤다. 그런 자의식이 있는 가운데 부르면서 한편으로 그것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것이다. 그런 공존의 느낌 같은 걸 원했다.” 곳곳에 낡은 흔적이 역력한 이 ‘계단언덕’ 주택가가 클래식함을 대변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요즘 젊은 남녀들의 키스가 적어도 열번 등장한다. “두번째. 키스에 대한 컨셉을 잡게 된 거는,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가로등, 골목길. 이런 생각이 나면서 누구나 연애할 때 골목길에서 뽀뽀를 많이 한다는 생각.” 스토리는 외로운 두 남녀가 “심플한 만남을 이룬다”는 것이 전부. 분주한 카메라워크나 때깔나는 CG를 동원하지 않는 “단순소박한” 이 뮤직비디오가 펼치는 것은 말하자면 캐릭터의 스펙터클이다. 주인공을 제외하고 커플이 총 10쌍인데, 사람 열아홉명에 개도 한 마리 끼어 있다. 문제는 각 커플에게 독특한 컨셉을 부여하는 것. “집요하고 까다로운” 류성희 미술감독 휘하 의상팀이 두달 동안 수십번의 의상 리허설을 했고, 의상색깔마저 겹치지 않게 모든 것이 최종 마무리되던 날 감독은 “의상컨셉주식회사 드디어 문 닫았다”며 자축언사를 날렸다. 디테일에 집착하기로 소문난 봉준호 감독은 일반인들 중에서 실제 커플을 골라 키스신을 찍어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던 과정 때문에 “일단 둘다 배우면서 커플인 경우, 그 다음엔 한 쪽이 배우이고 다른 한 쪽은 아닌 경우”를 고려해 출연진을 캐스팅했다. 연극원 학생 커플과 유시어터 배우 커플, 여자 연극배우와 회사원 남자친구 커플, 그리고 <살인의 추억>에서 조형구의 다리를 자르는 의사로 출연했던 연극배우 출신의 권병길씨 내외가 이렇게 간택된 캐스트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은 또 있다. 초록빛깔 옷에 같은 색깔 머리를 하고 시베리안 허스키와 키스하는 남자는 백광호 역의 박노식이다. 그날 낮부터 주욱 촬영 대기 중이라며 스토브에 손발을 녹이고 있던 그가 “나는 이렇게 추위에 떨고 있는데 내 커플은 자러 갔다더라”며 진심인 양 서운해한다. 영화 속에서 다리를 잘린 뒤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조 형사 역의 김뢰하는 그때 그 복장 그대로 목발을 짚고 등장해 순애보와 같은 사랑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의 후일담 같아서 민망했다”는 봉준호 감독은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변을 한다. 조 형사가 아름다운 여인과 키스를 나누는 동안 겨드랑이에 끼어 있던 목발이 빠져나가 계단 위로 스러질 것이다.

두 번째 외도

동시녹음이 필요한 영화 촬영현장에서는 일단 카메라의 릴이 돌기 시작하면 그 어떤 잡음도 끼어들 틈이 없다. 뮤직비디오 촬영현장은 큰 피해만 되지 않는다면 웬만한 소음을 너그러이 수용한다. 봉준호 감독은 중얼거리기도 했거니와 “승범이! 그거 좋았어! 그 표정 그대로!” 같은 디렉션을 커다랗게 외쳐댔다. “70년대 쌈마이영화 찍는 것 같기도 했고 너무 신났다.” 어려운 점은 영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촬영일정. 러닝타임이 4∼5분에 불과해도 2회 촬영으로 모든 걸 소화하기란 영화감독으로서 적응이 쉽지 않다. 류성희 미술감독을 비롯해 스탭 대부분을 <살인의 추억> 식구들로 꾸렸어도 “이제 좀 손발이 맞네” 싶은 순간 촬영일정은 끝자락에 와 있었다. “초반에 찍을 때부터 이미 완전히 발동이 걸려 있어야 한다. 영화 찍을 땐 오늘 첫 촬영이니까 슬슬 쉬운 것부터 해보지 뭐, 이런 게 가능해도 뮤직비디오는 초반이 전부다.” <외로운 가로등>의 촬영은 해진 저녁부터 다음날 동틀 때까지 이틀을 “풀가동”해서 무사히 마쳤다는 감독의 설명은 정말 명쾌하다.

사실 <외로운 가로등>은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외도다. “아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첫 뮤직비디오는 3년 전에 만들어졌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를 찍은 직후였다. 노래는 김돈규가 부른 발라드곡 <단(但)>. 배두나와 “그때 정말 신인이었던” 박해일이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들로 등장했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박해일이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가려 하자, 하얀 원피스 차림에 검은 웨이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배두나가 사람들을 헤치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손에 쥔 백장미 꽃다발은 긴 치맛자락과 함께 흔들리고, 두 연인의 떨리는 표정이 달리는 배두나의 하얀 구두와 교차편집으로 보여진다. “단편 3개, 장편 2개 만들면서도 이번 뮤직비디오로 처음 키스신 찍어봤다”는 감독의 첫 멜로 연출작이기도 한 셈이다.

봉준호 감독의 머릿속에는 극장용 장편영화 형식으로 시도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들이 여럿 굴러다닌다. 그는 피터 잭슨의 모큐멘터리 <포가튼 실버>나 마틴 스코시즈의 숏다큐멘터리 <이탈리안 아메리칸>을 예로 들면서 독특한 다큐멘터리 작업 욕구를 내비친다. 다큐멘터리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태도는 그의 영화들과 비교해봐도 별로 낯설지 않다. 계(界)를 뛰어넘어 상상하기보다 생뚱한 각도로 현실의 결을 클로즈업하고 싶은 욕구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첫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던 <마이 스윗 레코드> 같은 작업도 인상적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디지털로 찍은 화면과 사적인 말과 음악이 겹쳐 묘한 시적 감흥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의 코멘트도 해보고 싶다. 얼마 전에 디지털카메라도 한대 샀다.”

뮤직비디오는 이달 안으로 모든 작업을 마칠 예정이다. 심사위원 자격으로 일본 모리오카영화제에 다녀온 뒤 마무리 작업을 하고, 11월 도쿄영화제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차기작 시나리오 작업이 남아 있다. 빡빡한 일정을 차례차례 늘어놓던 감독이 신작에 관해서만큼은 꽁꽁 숨기려고 애를 쓴다. 몇달 전에 감독으로부터 직접 들은 시놉시스를 기자가 어설픈 기억으로 조각조각 읊자 흠칫한다. “뭔가 알면서 유도심문하는 거 아니냐?”고 방어하는 품새가 아무래도 그 기억이 정답이었구나 싶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얘기다. 하도 농촌에서 많이 찍고 힘들게 찍어서 논밭 근처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아직 정해진 건 없고, 정해진 게 있어도 계속 마음이 바뀌니까 시나리오가 나오면 어떻게 돼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요령있게 말을 돌려버린다. 여우에 비유할 수밖에 없는 봉준호 감독은, 네 번째나 다섯 번째 작품으로 사랑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둔 이야기도 몇개나 된다. 차차기작 계획으로 이것이 거의 확실한 거라면, 아닌 게 아니라 이번 뮤직비디오가 바로 “김성수 케이스”다.

“준환이가 찍는 뮤직비디오는, 다큐멘터리랑 같이 한다는 것 정도밖에 모르는데. 궁금하네, 얘가 또 어떤 장난을 쳤을까. 또 희한한 장난을 치지 않았을까? (대강의 스토리를 듣고 나서) 병구 어릴 때 이야기가 나와요? 귀엽겠네. 그런데, 왜 자꾸 우리 둘을 묶으려고 하는 거지? 단편할 때부터 계속…. 벌써 10년째야, 10년째. 지겹지도 않아요? 우리가 무슨 덤 앤 더머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좀 붙이고 그래봐요. 아참, 김 모 감독님도 지금 뮤직비디오 찍을까 말까 고민 중이던데, 잘됐네. 이 기사 묵혀뒀다가 그것까지 같이 해서 삼각구도 만들면 되겠다.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끈질기게 생각 중) 지금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아마 찾아보면 더 나올 거예요. 뮤직비디오 찍은 영화감독들 많잖아요. 우리 둘만 붙여갖고 뭐 하는 건 이제 그만!”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