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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힘을 다시 묻는다 - 한국영화의 미래를 찾아서 [3]
글·사진 이성욱(<팝툰> 편집장) 2003-12-05

영화를 혁명의 무기로 삼은 지 35년,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11월20일 Arcueil Cachan의 에스파스 장 빌라 극장. 시간은 밤 11시를 넘기고 있다. 밀레탕트(투쟁참여적) 시네마의 살아 있는 거장 장 루이 코몰리가 1시간 넘게 꼬박 선 채로 관객의 쏟아지는 질문에 응한다. 60년대부터 정치적 다큐멘터리 작업을 왕성히 벌이는 동시에 고다르와 함께 논쟁적인 글들을 생산했던 그의 에너지는 지칠 줄 모른다. 올해 퐁피두센터에선 코몰리 회고전을 열었고(마치 예술의전당에서 김동원 감독 회고전을 연 셈이랄까. 이때 코몰리는 10년에 걸쳐 완성시킨 다큐멘터리를 통해 지난해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켰던 극우파 장 마리 르펭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을 가했다), 최근에는 방송자본이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프랑스 영화현실에 반발해 “차라리 가난한 영화를 만들자”며 <카이에 뒤 시네마>에 또 한번 논쟁적인 글을 실었다.

이날 코몰리는 ‘다큐멘터리 스크린’이란 제목으로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행사에서 최근작 <파리 북역에서의 파업의 날들>을 상영한 참이었다. 영화는 95년 철도 총파업의 현장을 직접 카메라로 좇은 필름에 올해 봄 파업의 현장을 더해 편집한 것이었다. 7년이란 시간의 차이를 통해 파업 현장의 내부문제까지 들여다봤다. “TV나 신문 등 다른 매체가 파업을 다룰 때 어떤 클리셰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는 파업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부의 적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밀레탕트 시네마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 거리두기를 통해 무언가 일어나는 건 작가의 내부가 아니라 관객의 내부다. 그것이 무언지에는 관심없다. 그건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코몰리는 극장에 비치된 한 팸플릿에서 ‘슬론/이스크라’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이스크라는 하나의 역사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다. …우리가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나 매드베드킨의 영화를 보려고 한다면 어떻게 이스크라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 슬론/이스크라는 68년 이후 35년 동안 ‘밀레탕트 시네마’를 지칠 줄 모르고 제작·배급해온 신화적 존재다.

여성이라서 해냈다

다음날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슬론/이스크라의 사무실로 예고없이 ‘쳐들어갔다’. 행사 준비로 너무 바쁜 탓에 약속을 잡을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프랑스 예의에 어긋난 방문에도 그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인터뷰를 할 시간은 없었다. 슬론/이스크라를 설립하고 지금도 살림살이를 도맡고 있는 프로듀서 잉게르 세르볼린은 맘씨좋은 아줌마의 미소를 지으며 일단 자료만 챙겨가라며 68년부터 보관해온 귀중한 기록들을 꺼내주었다. 그는 내일 밤 상영회를 갖는 매드베드킨 그룹을 마중하러 갈 참이었다. 매드베드킨은 <히로시마 내사랑>의 알랭 레네와 함께 영화를 찍으며 누벨바그의 좌파그룹을 형성했던 크리스 마르케에 기원을 둔 ‘노동자 시네아스트’ 집단이다. 68 당시 크리스 마르케는 한 자동차공장의 노동현장을 다룬 <곧 다시 보기를 희망한다>를 만들어 노동자들을 상대로 순회 상영을 시작했다. 일군의 노동자들이 “편집이나 미장센이 너무 부르주아적이다”라며 혹독히 비판을 가해오자 마르케가 “그러면 당신들이 나 대신 카메라를 잡아라”라고 제안하면서 탄생한 게 매드베드킨이다.

주말인 다음날 저녁, 매드베트킨의 작품과 슬론/이스크라를 만든 68혁명 당시의 다큐멘터리들이 상영됐고, 매드베트킨 그룹과 관객과의 대화가 벌어졌다. 관객의 질문은 공격적이었다. “이런 영화가 관객과 만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니냐?”, “시간이 흐르면서 상업화된 건 아니냐?” 등등. 그룹 중 한명이 흥분한 상태로 대답했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했다. 파업이 벌어지는 와중에는 우리 영화가 주목을 받지만 파업이 끝나면 우리 영화는 체제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다. 현장뿐 아니라 체제 안에서도 영화를 상영하는 걸 거부할 순 없다. 중요한 건 찍고 편집하고 상영한 뒤 토론하고 논쟁하며 다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슬론/이스크라의 살림꾼 세르볼린이 나섰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남은 건 일방적 계몽이 아니라 노동과 시네아스트의 대등한 공존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 정신은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68년 이후 프랑스는 물론이고 독일, 스웨덴, 일본 등에서 우리와 비슷한 수많은 단체가 생겼으나 지금껏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건 우리뿐이다.” 그는 한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35년 동안 초창기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며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이 단체를 여성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권력이나 정치 상황을 보는 시선이 뭔가 다르다. 그리고 남자들보다 뚝심이 더 세다.”

“누벨바그 세대는 보수파가 됐고, <카이에 뒤 시네마>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잡지가 됐다”

아들은 아버지를 부정하게 마련인가. 68세대는 부모의 유산을 모조리 부정했다. 그렇다면 68세대의 자식들은? 화가 출신의 감독 올리비에 메가통은 “누벨바그는 끝났다. 그들 세대는 영화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새롭고 현대적인 영화를 만들려는 젊은 작가들의 길을 막고 있다. 68정신으로 돌아간다는 건 명백한 후퇴다”라고 잘라 말했다. 메가통은 심리스릴러 <비상구>(2000)로 장편 데뷔한 뒤 학대받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평을 얻은 <빨간 인어>(2002)를 만들었다. 그는 ‘뤽 베송 사단’으로부터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뤽 베송은 <레옹>을 찍을 때부터 자기 그룹에서 함께 일하자고 계속 손을 내밀었지만 메가통이 응하지 않자 지금은 거꾸로 “당신의 다음 작품에 뭔가 참여하고 싶다”고 제안해온 상태라고 한다. 그의 부인은 뤽 베송과 벌써부터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68시대는 폭발해서 사라졌으며 68세대의 영화인들에게는 이제 개방적 시선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그렇다고 그가 할리우드식의 스펙터클영화를 지향하는 건 아니다. “영화는 당연히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사회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 그래야 10년 뒤에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가 될 수 있다. 모든 영화가 이런 인식을 갖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메가통은 아버지 세대뿐 아니라 일본의 사소설 같은 앵티미즘이 프랑스영화의 60%를 차지하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내 삼촌이 어떻고, 내 옆집 사람이 어떻고 하는 등등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영화를 누가 보고 싶겠느냐는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그에게 누벨바그와 앵티미즘의 대안은 프랑수아 오종인 것 같았다. “오종 역시 앵티미스트이긴 하지만 그는 다른 맥락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 지금 영화학교의 선생은 대부분 누벨바그 세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발전이 없다. 학생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오종 같은 이가 학교로 들어가 가르쳐야 한다.”

그렇다면 뤽 베송은? “그는 교육적으로 별로 좋지 않다.”

프랑스인이지만 미국에서 성장해 6년 전부터 파리로 건너와 영화 제작·배급사 스텔라그룹을 이끌고 있는 K.C. 슐베르그(Schulberg)도 “누벨바그는 죽었다”고 단언했다. 아벨 페라라의 <킹 오브 뉴욕>, 뤽 베송의 <그랑 블루> 제작에 참여했던 그는 <아멜리에> 같은 영화가 좋은 방향을 제시한 게 아니냐고 반문해왔다.

중재자는 시네필이 맡아야 할 듯했다. 말론 브랜도의 <워터 프론트>와 스파이크 리의 최근작 <파이팅>의 시나리오를 쓴 노장 작가 버드 슐베르그(그는 지금 89살이다)와 함께 장편 데뷔작 <더 데어>를 준비 중인 피에르 필몽(33)이 그랬다. “마티외 카소비츠는 칸에서 열광받고 미국으로 건너가버렸지만 카소비츠말고도 사회문제를 다루는 젊은 감독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장 프랑수아 리셰, 로랑 캉테, 장 마르크 무투, 도미니크 카브레라 등등 아주 많다. 왜 늘어나고 있냐고? 세계에 문제는 많고, 전쟁도 자꾸 벌어지고, 그런 것에 대해 영화로 다루고 싶어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필몽 자신은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르,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것으로 영화를 배운 앵티미스트라고 했다. “프랑스인들은 뭔가 심리적인 것이나 버려진 삶에 관심을 갖고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앵티미즘 경향이 생긴 게 아닐까. 미국영화처럼 스펙터클한 영화에 비해 작은 공간에서 두세명이 이야기하는 걸 찍으면서 오히려 포괄적인 걸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아버지 세대의 작가들이 영화를 여전히 만들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그는 뜻밖에도 <카이에 뒤 시네마>에 대해서 단호했다. “예전에는 영화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잡지였으니까 모두가 봤지만 지금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에 반대하는 잡지들이 계속 생겨나는 데다 결정적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는 영화에 대해 말하며 영화와 함께 가지 않는다. 영화와의 관계가 아주 많이 벌어져 있다. 그래서 나도 안 본다.” 올리비에 메가통도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했다.

통역 차민철, 장태순, 오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