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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미리 보기 [2]
이영진 2003-12-12

평양으로 북진하다

역사 속으로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도를 보면, 서울 일대 지역은 ‘Mud’라는 암호로 표시되어 있다. 도시연구가 손정목씨는 “인민군에 의해 진흙탕이 된 곳”이거나 “하찮은 지역이니 싹쓸이해버리자”라는 뜻이 아닐까 추정한다. 어쨌건 대규모의 공중 폭격과 함께 인천에 상륙한 뒤, 연합군은 북상을 시작했고 낙동강 일대의 인민군은 퇴로를 차단당한 채 투항 또는 죽음을 택해야 했다.

스토리 수차례 기습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진태는 상관으로부터 신임을 얻는다. 한편, 진석은 욕심없던 형이 전쟁에 빠져드는 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진석은 형에게 앞으로 위험한 일에 나서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도대체 먹히지 않는다. 마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이들 두 형제의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북진의 행로를 따른다.

촬영장에서는 경상남도 합천의 2만평 부지에 세운 평양 세트는 무려 17억원이 들어간 대형 구조물. 지반이 단단한 암석이라 1채당 2t이나 되는 철골을 그 위에 얹었지만, 하늘의 시기를 당해낼 순 없었다. 올 여름 태풍 매미로 말미암아 20여채의 상점이 날아갔고, 제작진이 고증과 상상으로 그려내고 손과 발로 만들어낸 세트는 풍우가 몰아친 하룻밤 사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책정된 추가예산과 개봉시기를 고려할 때, 50여동을 세우려던 애초 구상을 실현하기란 불가능한 일. 촬영 당시 강제규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은 “복구를 하긴 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구멍이 송송 나 있더라”고 당시의 당혹스러움을 털어놨다. 그러나 현장에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대어야 하는 상황이 태반이다. 제작진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평양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땅을 파헤치고, 인민군 대좌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진태와 그를 뒤따르다 소대원 영만이 죽게 되는 상황을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의 거친 핸드헬드로 뒤쫒았다. 또한 카메라가 역광으로 인해 강한 콘트라스트의 풍광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인물들의 동선을 짰다. 평양장면에서 내내 뛰어다녀야 했던 장동건은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무릎이 좋지 않은데다 경주 촬영에서 발목에 금이 갔던 터라 제작진의 애간장을 태웠다.

핵심 포인트 3대의 카메라가 동원된 평양 시가전의 경우, 생생한 파편들이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제작진은 말한다. 인민군과 국군의 교전 중에 흙, 돌, 쇠 등 다양한 파편들이 튀겨져 나가고 인물들간의 동선과 엉키면서 역동감 있는 전투장면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성적인 느낌의 종로 거리와 달리 “수직이 교차하는 힘있는 남성적 공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평양 시내 세트를 부감으로 관망하는 것도 재미다. 이쯤에서 한번 상상해보자. 전쟁광이 되어가는 진태가 광기의 블랙홀 평양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압록강을 뒤로 하다

역사 속으로 전세가 역전된 뒤 연합군의 북진 속도는 개전 초기 인민군의 남하 속도만큼 빨랐다. 10월 들어 김일성, 박헌영 등 북한 지도부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다급해졌다. 반면, 미군과 국군은 먹이를 앞둔 맹수처럼 경쟁하듯 치고 오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형국에서 10월20일을 전후로 26만여명의 중공군이 월경,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스토리 북진 도중 탄광촌에서 생포한 인민군 포로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진태를 진석이 막아선다. 동생의 제지에 포로를 살려주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이들 부대는 피난 행렬과 함께 다시 서울로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그 와중에 포로들이 반항하자 진태는 용석을 쏴 죽인다. 어릴 적 동생처럼 여겼던 용석에게 총을 겨눈 진태를 용서할 수 없는 진석은 형을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팁3-파편 예고편을 보면, 폭발장면에서 카메라와 인물의 얼굴 등으로 파편이 튄다.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았냐고? 현장을 방문했던 취재진의 경우, 이러한 상황을 한차례 실제 경험한 적이 있다. 제작진이 취재진에게 맛보기로 보여준 것인데 흙더미만이 높게 사방으로 솟구쳤을 뿐 해를 입은 이는 없었다. 데몰리션 정도안 대표는 나무껍질, 톳밥 등을 이용하고, 폭약을 평소보다 깊이 묻어 안전뿐만 아니라 흙이 통째로 날아오는 질감까지 냈다. “우리 팀에는 마루타가 있어 항상 안전실험을 하니 걱정 말라”는게 정 대표의 여유있는 농담.

촬영장에서는 촬영에 돌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찍은 겨울장면 분량이다. 해발 1100m에 이르는 대관령을 비롯해 강원도 양구, 사북 등을 오가며 촬영했다. 현지인들이 5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해서 안심했다가, 정작 촬영일에 이상기온으로 하루에도 1m가 넘는 눈더미가 녹아내리는 등 촬영장 일대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제작진을 고심에 빠뜨린 장소이기도 하다. 강제규 감독이 “제발 오늘은 촬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침마다 기도했다”는 말은 엄살이 아닌 듯. 양구를 시작으로 인제 촬영까지 눈을 담기 위한 사투는 촬영기간 6주 동안 계속됐다. 이탈리아제 수입눈을 깔기도 했지만 고가라 맘껏 쓰지도 못했다. 이곳에선 1·4후퇴 등 피난장면을 담아야 했으므로 군중이 대거 등장한다. 대략 이 장면에 동원된 보조출연자 수는 2천여명. 하지만 제작진은 워낙 열악한 여건 때문에 출연을 저어하거나, 이튿날이면 못하겠다며 중도 포기하는 보조출연자들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쉬엄쉬엄 봐가며 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는 입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기 때문. 대부분이 카메라에 걸리는 장면이라 5분대기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현장을 메우기 위해 제작부와 연출부를 포함한 상당수의 스탭이 군복으로 갈아입고서 1인2역을 해야 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공훈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게 된 진태와 친구 용석을 잃은 진석이 서로 다투는 장면 등 배우들로선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을 먼저 찍어야 했으므로 쉽지 않았을 일.

핵심 포인트 석분과 밀가루가 만들어내는 설원에 타이어가 피어올리는 검은 죽음의 연기가 대조를 이루는 풍경 또한 기대되지만, 그보다 강제규 감독은 “전쟁에 물들어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들 내면의 삭막함을 보아달라”고 말한다.

팁4-백병전 광활한 벌판에서 벌어지는 떼싸움을 연출하기 위해서 정두홍, 김민수 무술감독이 가장 고민한 부분은 “진짜 싸움을 보여주되” 어떻게 하면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결과는? 정 감독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대역없이 배우들이 직접 실연하다보니 아무래도 전문가들의 눈에는 차지 않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쉬워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움직임에 감정이 살아 있다. 그거 하나면 된다”고 답한다. 김 감독 또한 “실제 대검을 꽂은 두밀령 전투 때는 동선이 좁아 위험하긴 했지만 두 배우 모두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덧붙인다.

두밀령에 비극을 묻다

역사 속으로 1951년 봄까지 전란 중 서울의 주인은 네번이나 바뀐다. 북진과 남하가 썰물과 밀물처럼 오가는 동안 학살과 처형은 늘어갔다. 힘의 균형이 이뤄진 것은 37∼38도선. 승자없는 싸움임을 확인하고 휴전협정을 맺기까지 이곳에 위치한 고지들은 서울이 그러했듯이, 남과 북이 번갈아 뺏고 뺏는 약탈의 대상이 된다.

스토리 서울의 영신은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위기에 처한다. 퇴각 중 서울집을 찾은 진석이 이를 목격하고 제지에 나선다. 한편, 대대장에게 애초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청한 진태는 진석이 이미 후방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서 뒤를 따라나선다.

촬영장에서는 두밀령은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 공간이다. 백마고지처럼 밀고 밀리는 싸움이 치열했던 당시의 고지를 염두에 두고 설정한 것.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에서 두 형제 또한 헤어진 다음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하다 대면케 된다. 그곳이 두밀령이다. 실제로는 경남 합천의 황매산에서 찍었다. 경사가 무려 45도. 서 있기조차 힘든 이곳에서 배우들은 몸을 날려야 했다. 발목을 포함해서 부상자가 하루에 적어도 3명씩은 속출했다. 레일을 까는 것은 물론이고 진태와 진석을 잡기 위한 카메라 동선마저도 확보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해결했냐고? 홍경표 촬영감독의 답은 간단하다. “며칠 지나서 몸에 익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요령이 터득되더라는 것” 대부분의 액션을 스턴트 대신 직접 소화했던 주연배우들 또한 백병전이 지속되는 두밀령 전투를 가장 힘들었던 촬영으로 기억한다. 특히 이 장면에서 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가야 하는 원빈은 더욱 그러했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강제규 감독 또한 이 장면을 찍기까지 탈진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촬영이 50% 가까이 남았지만, “끝내고 나서 이제 이 영화 다 했구나” 싶을 정도였다.

핵심 포인트 아무래도 베일에 싸인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 일 것이다. 이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털어놓기 곤란하다. 앞 전투들에서 선보였던 액션, 특수효과들이 모두 동원되어 농축된 형태로 이 장면에서 한꺼번에 쓰였다고 한다.

앞으로 50일. 1년6개월 동안의 프리프로덕션, 136회 촬영에 순제작비 146억원을 들인 이 영화를 편집하느라 강제규 감독은 박곡지 편집실에서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다. 홍경표 촬영감독 또한 디지털 색보정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사운드 후반작업은 <쉬리>에 이어 블루캡 김석원 대표가 맡았다. 폭격기를 비롯해 실사 같은 3D 화면을 빚어내야 하는 임무는 강종익 실장 몫이다. 강제규 감독은 “아직도 손볼 부분이 많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혈색을 찾은 얼굴은 자신감의 우회적인 표현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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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에 해당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자문위원이기도 한 박명림 교수의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Ⅰ> 및 <한국사>(한길사 펴냄) <서울도시계획이야기-1>(손정목, 한울)을 참조한 것이다) ·사진제공 강제규필름, 영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