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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그 신화의 현장 도쿄를 가다 [1]

현대 영화의 무의식이 된 거장

오즈는 미조구치 겐지와 구로사와 아키라가 시대극으로 서구의 영화진영에 제국의 매혹을 뿌리고 있을 때조차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전전 할리우드 모방기를 거치고, 전쟁의 참혹함을 겪으면서 이른바 오즈 스타일의 영화에 이르고 나서는 반복 속에 차이를 두면서 천천히 시대를 타고 갔다. 오즈 영화의 인물들은 일본의 전통 가옥 안에 앉아 날씨와 음식에 대해, 장례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시에 모던한 바와 사무실에 앉아 네온사인과 기계소리를 보고 듣는다. 오즈는 변해가는 시대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는 인물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소박하다’는 착각을 주는 상상불허의 방식으로 상업·예술영화를 만들었다. 오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씨네21>은 ‘오즈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일본 현지의 공기를 마시고, 그의 묘지에 물을 뿌리고, 전시장과 상영관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오즈를 말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모여든 평론가와 거장 감독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유는 하나뿐이다. 더러는 몇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낡은 유행처럼 화석이 되는 감독들이 있지만, 오즈는 그 반대의 상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지금 여기’ 이 시대 안에 살아 있다.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 연보

1903년

도쿄시 근방 후카가와에서 태어나다.

1917년

이 해 개봉한 토머스 H. 인스 감독의 <문명>(Civilization)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하다. <쿼바디스> <폼페이 최후의 날> 등 이탈리아 역사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를 빼먹다. 카메라를 만지기 시작하다.

1923년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에 촬영부 조수로 입사하다.

1924년

평생을 간직할 영화 <결혼철학>(에른스트 루비치)과 <파리의 여인>(찰리 채플린)을 보다. 어느 날인가 우시하라 기요코 감독에게 “다음 세대의 영화는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라고 진지하게 묻다. 도쿄 아오야마의 근위보병에 현역 1년으로 입영하다.

1925년

1927년/감독으로 승진하다. 9월, 첫 영화로 시대극 <참회의 칼>을 찍다. 예비역 소집을 받아 다시 소환되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참회의 칼>의 첫 장면을 사이토 도라지로가 찍어 완성하다. <참회의 칼> 개봉 전날 제대하다.

1930년

개그맨 제임스 마키라는 필명을 등장시키다. <낙제는 했지만>에 평생의 페르소나가 될 배우 류 치슈를 드디어 주인공으로 쓰다

1932년

<태어나기는 했지만> 개봉. 처음으로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을 버리고 컷만으로 영화를 완성하다.

1933년

<동경의 여인> <비상선의 여자> 개봉. 카메라의 포지션이 정해지다. 평생의 영화친구 야마나카 사다오를 소개받다.

1936년

첫 번째 토키영화로 <외아들>을 완성하다.

1937년

가마타 스튜디오에서 오후나 스튜디오로 옮긴 뒤 <숙녀는 무엇을 잊었는가>를 촬영하다. 다케하시의 근위보병 제2연대로 입영하다. 상하이 상륙 뒤 독가스 부대에 배속받다

1938년

야마나카 사다오의 병사 소식을 듣다. 시름에 빠져 며칠간이나 입을 열지 않다.

1939년

소집해제되어 귀가하다.

1943년~1945년

군 보도부 영화반원으로 싱가포르에 가다. 어느 날 <시민 케인>이라는 영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만약 채플린에게 62점을 준다면 이 영화는 85점이다”라고 말하다.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만춘>을 찍다. 이후로 유작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시나리오 작가 노다 고고와 평생을 작업하다. 다시는 홈드라마 장르를 벗어나지 않다.

1952년

<오차즈케의 맛> 촬영. 색구분 콘티를 사용하여 롱숏, 클로즈업 등을 구분하기 시작하다.

1953년

전세계적인 대표작 <동경이야기>를 집필, 촬영, 개봉하다.

1955년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을 보고 “지금까지의 일본영화 중 최고의 수준”이라고 격찬하다.

1958년

최초의 컬러영화 <피안화>를 완성하다.

1959년

치쿠가 아닌 도에이 영화사에서 <부초>를 만들다.

1960년

<가을 햇살>이 <은령의 왕자>와 함께 이해 일본에서 제작된 스탠더드 영화 두 작품 중 하나가 되다.

1961년

치쿠가 아닌 도호에서 <고하야가와 가의 가을>을 만들다.

1963년

유작 <꽁치의 맛>을 완성하다. 다음 작품의 제목을 <무와 인삼>으로 결정하다.12월12일. 60회 생일을 맞다. 그리고 사망하다.도쿄 근방 기타-가마쿠라 지역의 엔가쿠지에 묻히다. 묘비명에는 ‘無’라는 단 한 글자가 새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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