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차승재라는 화두에 대한 근심 [1]

영화평론가 허문영, <살인의 추억>에 대한 열광과 <선택>의 실종을 비판하다

인터넷 소설로부터 발원한 영화와 그 주역인 소년소녀들에게 응원가를 보냈던 정성일(<씨네21> 436호), 지난해 한국영화 문제작들의 미학적, 정치적 성취와 한계를 분석했던 김소영(<씨네21> 437호)에 이어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한국영화에 고함’ 시리즈의 마지막을 맡았다. <살인의 추억>에 대해 비평계가 단조로운 열광을 보내고 차승재식 패러다임이 영화계를 제패하는 사이에 "2003년의 가장 중요한 영화"인 <선택>이 비평적으로 실종되어 버린 것을 교차시켜 분석했다. <씨네21>의 전 편집장이 <씨네21>에 보내온 메타 비평의 정수.

나는 <살인의 추억>은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보다 더 뛰어나진 않아도, 그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유령>보다 훨씬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유령>보다 더 흥미진진하지 않다. 왜 그럴까. 무엇이 달라져서 그럴까. 근심은 거기서 시작된다. 이 근심은 한국영화에 고할 만큼 엄격하게 정제하지 못했으므로, 이 글은 근심의 독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생각의 작은 소재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사족이지만, 지난해 말 어떤 술자리에서 별 확신없이 나도 모르게 “이제 차승재 시대는 끝나야 돼”라고 불쑥 그에게 말한 뒤, 함께 있던 그의 직원들이 의아해하는 동안 그가 빙긋 웃으며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데 나 몇 년은 더 만들어야 돼”라고 대답했을 때, 비로소 내 근심이 무엇인지 곰곰이 들여다보게 됐고, 그 근심을 말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1. 차승재에의 추억

<씨네21>에서 일하고 있던 2001년 가을, 추석 연휴를 마치고 출근하자 <조폭마누라>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함께 개봉한 <봄날은 간다>는 부진했다. 그 전까지 <조폭마누라>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조폭마누라>를 나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떤 쓰레기는 흥미롭고, 때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흥행과 작품성과는 무관하다. 하지만 이 경우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급하게 ‘한국영화 흥행 이상 징후’라는 특집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악한 영화가 흥행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가 실패한다면 이건 한국 영화산업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담은 특집이었다. 몇몇 다른 매체들에서도 비슷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일부 매체들과 또 적지 않은 독자들은 그 논조에 비판적이었다. 관객의 기호에 윤리적 잣대를 갖다대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영화를 보러갔다고 멍청한 관객이란 말인가.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하는가”라는 투의 직설적 반론도 있었다. 그 지적들은 훌륭했지만 우리는 우려를 멈추지 못했다. 그리고 조폭코미디의 전성기가 열렸다. <두사부일체> <달마야 놀자>가 연달아 극장가를 호령했다. 우리가, 아니 내가 근심한 건 실은 <봄날은 간다>를 만든 제작자 차승재였다. 물론 자연인으로서의 차승재를 근심한 건 아니다. 나는 그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중심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물론 산업의 중심은 강우석이었고, 미학의 중심은 임권택과 홍상수, 혹은 김기덕과 이창동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느낀 것은 그가 가장 모험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텍스트의 모험으로 (미학적 성공이 아닌) 대중적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이었고, 그 시도가 대중적 신뢰라는 응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기서 심재명을 함께 말해야겠지만, 그는 대중성을 기대하기 힘든 작가영화와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르영화를 비교적 명확히 구분해 제작해왔기 때문에 덜 극적으로 보인다. 차승재 영화가 흥행할 때, 이상하게도 그것은 관객의 열광이 아니라 관객의 신뢰의 표현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열광이 아니기 때문에 차승재 스스로 말한 ‘저항선’이 그의 영화에 있어왔지만(그때까지 차승재 영화는 서울관객 50만명을 넘은 영화가 한편도 없었다), 또한 그것이 신뢰이기 때문에 한국영화 전반에 대한 대중적 신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아슬아슬한 텍스트를 던졌고, 어렵사리 대중적 화답을 얻어냈다. 그 전 과정이 아찔한 스릴러의 불안과 쾌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건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도정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현상으로 내게 비쳐졌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한국영화를 한국 관객이 더 많이 소비하기 이전에, 더 많이 신뢰함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1999년의 <유령>이 그랬다. 차승재는 이미 <비트>와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의 당당한 수확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유령>은 지나친 모험이었다. 허름한 창고에서 잠수함 영화를 만든다는 건 무모한 짓이었고, 때아닌 국수주의 영웅 타령도 위험해 보였다. 완성된 <유령>은 흥분에 가까운 쾌감을 갖다주었다. 그것은 걸작의 발견에서 오는 흥분과는 달랐다. 민병천 감독은 섭섭할지 몰라도 <유령>은 온전히 차승재의 영화였다. <유령>은 형식의 한계가 아니라 조건의 한계에 도전하는 영화였다. 그 도전의 와중에서도 영화 속 캐릭터는 거의 전적으로 존중되고 있었다. 그것은 고전적 장인 정신과 현대적 모험심의 합주로 느껴졌다. 신뢰할 가치가 있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유령>의 흥행성적을 뒤로 하고 얼마 뒤 싸이더스 대표로 변신했고, <썸머타임> 때처럼 실족도 했지만, 차승재의 노선은 변치 않았다. 그러나 관객이 달라졌다. <유령>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밀렸지만, <봄날은 간다>는 <조폭마누라>에 밀렸다. 그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조폭코미디의 전성기가 지속된다면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신기루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스크린쿼터가 지켜야 할 신뢰할 만한 가치가 한국영화에 더이상 남아있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 2001년 가을 우리의 우려였다.

차승재에게는 여기에 충무로 돈 가뭄까지 겹쳤다. 결국 모험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영화를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차승재는 버티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2003년 부활했다. 2003년은 차승재 노선이 완벽한 승전보를 울린 해였고, 그 곁에는 <지구를 지켜라!> <싱글즈>와 함께 <살인의 추억>이 있었다. 변심한 것처럼 보였던 관객은 가장 큰 환호를 그에게 보냈다. 신뢰와 더불어 열광까지 그에게 주어졌다. 2001년의 가을을 기억하는 나로선 그 신뢰와 열광이 즐거웠다.

개봉 당시에 얼마간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살인의 추억>은 또한 평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모든 영화상을 휩쓸었다. 여기서부터 약간의 의심이 시작됐다. <살인의 추억>을 누군가가 최고의 영화로 꼽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연말까지 이어진 그 집단적 환호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의심은 <선택>의 실종 때문에 더 짙어졌다. <선택>은 개봉 뒤로 모든 매체에서 사라졌고, 갖가지 영화상 시상식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나는 <씨네21>이 2003년 결산기사에서 이 영화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는 데 깊은 불만을 갖고 있다). <선택>은 영화를 왜 하는가, 혹은 영화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상기시켜준 2003년의 가장 중요한 영화다.

조폭코미디 번성기 때의 ‘와라나고’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영화가 극장에서 외면당했다고 해서 관객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억지 회생의 노력을 벌이는 일은 착하긴 하지만 허무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살리는 게 아니라 그의 실패를 슬퍼하는 것뿐이다. <선택>은 무참하게 실패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지구를 지켜라!>의 상업적 실패에는 많은 매체와 평자들이 슬퍼했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 자체로 2003년을 빛낸 수작이며 차승재식 모험의 담대함을 감탄케 하는 영화다. <선택>의 실패 뒤에는 어떤 비가도 따르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혹시 차승재식 모험의 스펙터클에 빠진 채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 않은가. ‘차승재의 영화’에서 우리는 ‘영화’보다 ‘차승재’를 더 많이 보고 있는 건 아닐까.

2. 웰메이드와 진정성

잠시 딴소리를 한마디 하고 싶다. 웰메이드와 진정성, 나는 이 두 단어가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웰메이드는 조폭코미디의 악몽에서 빠져나온 2003년의 안도가 낳은 단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2003년으로 시효가 끝나기를 바라는 단어다. 세공술에 관한 표현이라면 웰메이드는 미덕이 아니라 의무다. 만듦새가 좋다는 게 어떤 영화의 중요한 자질이 된다면 그건 한국영화의 수준을 스스로 비하하는 일이다. 혹은 그 영화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말하지 못할 때 동원되는 텅 빈 찬사가 되기 쉽다. 오히려 이 단어는 엉성한 영화인데도 남다른 가치가 있을 때, ‘웰메이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라는 한정적인 용법으로 쓰는 게 훨씬 의미있게 들린다.

진정성이란 용어는 사적으로 쓰지 않고 공식적인 논평에 들어갈 때, 나는 무섭다. 거의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좁은 의미의 진정성은 자신이 재현하려는 대상에 대한 창작자의 애착을 지칭한다. 그건 창작자의 비밀에 속하는 일이며, 그 자신조차 모를 수 있다. 작품의 형식적 자질이 아니라, 창작 동기의 윤리성으로 그 작품을 재단해서도 안 되고 재단할 수도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작품 자체일 뿐이다. 다만 세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 혹은 휴머니티의 뜻으로 이 단어를 쓴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경향의 영화를 말하는 것일 뿐이며, 그 작품의 자질과는 관계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킬 빌>은 티끌만큼의 진정성도 없지만 극히 사랑스런 영화다.

두 단어를 걸고넘어진 것은 2003년의 한국영화를 말하는 글에서 ‘진정성은 없지만 웰메이드하다’라는 투의 표현이 꽤 여러 곳에서 목격됐기 때문이다. 그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텅 비었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웰메이드조차 아니다. 2003년의 한국영화를 말하려면 차라리 장르적 양식미의 세련화와 그에 대한 대중적 선호를 언급해야 한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