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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결산 [4] -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눈물 흘리는 초원>

베를린에서 만난 영화 2 -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눈물 흘리는 초원>

시적 영상으로 그리는 눈물의 그리스사(史)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20세기를 눈물의 시대라고 기억한다. “초원에 떨어진 이슬은 대지가 흘리는 눈물과도 같다”고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그는 전쟁과 내전, 또 다른 전쟁이 오고가던 20세기 한복판의 그리스를 한 여인의 생 안에 담아넣었다. 그가 두손을 모아 눈물을 받아주는 여인의 이름은 엘레니. 사랑 때문에 쫓겨다녔던 그리스 신화의 헬레나지만, 앙겔로풀로스는 그녀가 피를 나눈 두 오빠가 서로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 안티고네고, 눈앞에서 살해당한 아들을 위해 통곡하는 안드로마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1919년, 러시아 적군(赤軍)이 오데사를 점령하자 그리스인들은 국경지방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호수 근처 빈터로 탈출한다. 그 여정의 도중에서 알렉시스의 가족은 죽은 엄마 곁에서 울고 있던 아기 엘레니를 데려온다. 두 아이는 자라면서 연인이 되고, 가족의 반대를 피해 달아나 쌍둥이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전쟁은 알렉시스와 엘레니, 그들의 두 아들을 네 갈래로 찢어놓고 만다. <눈물 흘리는 초원>(Trilogia: To livadi pou dakrisi)은 아주 오랜 시간을 인내해야 하는 영화다. 그것은 170분이라는 물리적 상영시간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카메라는 배우가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멀리서만 머물고, 대사는 극도로 적고, 드라마는 자주 생략된다. 그러나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느닷없이, 마흔도 안 됐을 젊은 여인의 얼굴에 새겨진 고통이 다가온다.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긴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는 그 몸과 얼굴 안에 극단의 시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늙은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듯한 <눈물 흘리는 초원>은 한 기자가 ‘시(詩)적 충격’이라고 표현한 아름다운 영상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케르키니 호수와 테살로니키에 직접 지은 마을 두 군데는 피난처답게 황량하지만, 먼지와 바람의 느낌이 묻어나는 무채색만으로도, 감히 망각의 죄를 범해선 안 될 것 같은 풍경을 천천히 그려나간다. 이미 칸과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앙겔로풀로스는 놀랍게도 이번에 단 하나의 트로피도 가져가지 못했다. 그러나 시사회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은 마치 자신의 영화처럼 느리고도 시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앙겔로풀로스에게 기립박수를 보냄으로써 경의를 표했다.

-당신은 이 영화를 3부작으로 기획했다. 무엇이 당신을 이 영화로 이끌었는가.

=나는 생애 대부분을 20세기에서 보냈다. 그 때문에 그 시대를 주의깊게 돌아보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 영화는 눈물 흘리는 여인의 모습에서 끝나는데, 내게 20세기란 바로 그런 눈물로 끝을 맺는 시대였다. 3부작의 두 번째 영화는 스탈린 사망 무렵부터 베트남 전쟁이 끝나던 해까지 일어나는 이야기고, 세 번째 영화는 다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마지막 영화에서 나는 불가능한 귀향,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인간의 모험을 이야기할 것이다. <오디세이>와 다른 모든 그리스 비극은 그런 귀향과 모험을 들려주면서 운명에 대항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당신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세상에 개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영화를 만든다. 나는 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군이 물러간 뒤에, 내 가족은 산산히 흩어졌다. 다소 좌익 성향이 있었던 아버지는 사촌의 고발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울부짖는 엘레니의 얼굴은 바로 내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잡고 수백구의 시체 밑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찾아다녔다. 그 때문에 나는 인간의 비극을 영화로 만드는 걸 멈출 수 없다.

-당신은 카메라와 색채, 음악이 모두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감독이다. 좀더 다양한 실험을 시도할 수도 있을 텐데.

=영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감독들은 모두 기본에 집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들의 영화가 반드시 그러해야만 했던, 꼭 그만큼의 영화를. 나는 현재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흐름이 중요하고, 영화라는 거대한 강을 풍요롭게 만들 거라고 믿지만, 그 강물이 항상 맑은 것만은 아니다. 또한 흐려졌다가도 맑은 기운을 회복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삶과 같다. 혹은 삶은 영화와 같은 것일까? 당신 마음에 드는 답을 선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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