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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회 맞는 순풍 산부인과 [1] - <순풍…> 마니아들
김혜리 2000-02-29

500회 맞는 컬트 산부인과 열혈 시청자 출산의 비밀

장난이 아니다, 인간이 들어 있는 게다

영화가 생활공간에서 잠시 벗어나 들이쉬는 심호흡이라면, 텔레비전의 맥박은 일상과 같은 박자로 고동친다. 시간을 가둬두고 몇몇 주역의 운명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영화와 달리 TV는 매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흐르듯 비춘다. 드라마와 시트콤은 그래서 대중과 격의없는 ‘친구’가 되기 유리한 처지에 있는 반면 홀대당하거나 잊혀지기도 쉽다.

오는 3월8일 500회를 맞는 SBS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연출 김병욱)는 그런 의미에서, 살붙이의 친밀함과 명품의 ‘귀태’를 한 그릇에 담은 진귀한 일품요리다. 경쟁사 9시 뉴스를 종종 거꾸러뜨릴 만큼 치솟은 시청률(2000년 2월1∼23일 해당 시간대 평균 가구 시청률 25.1%, 개인 시청률 10.8%로 4개 채널 중 1위)도 경이롭지만 마니아들의 충정도 <ER>이나 <X-파일>에 꿀리지 않는다. 각종 동아리에 사이버 스페이스를 분양하는 Daum 카페 사이트에는 ‘순사대’(순풍을 사랑하는 대딩들)를 위시해 3개의 순풍 팬클럽이 공존하며, 4대 통신망에는 <순풍…> 열혈 시청자 모임이 개설돼 있다. 하이텔의 ‘순풍 대본 미리 보기’ 메뉴의 조회수는 350회 이후부터 많게는 2천명을 넘본다. 이들은 직장에서 몰래 <순풍…> 보는 법을 논하는가 하면, “오늘 순풍 놓친 분들, 내일은 꼭 챙겨봅시다”라고 따뜻이(?) 서로를 격려하며 <순풍…>을 정점으로 구획된 하루를 산다. 이 많은 사람들은 왜 “순풍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외치는 걸까. 어차피 매일 보는 <순풍…>이지만 한번 더 뜯어보자.

등신대로 빚어 세공한 캐릭터들

간지럼을 태워 짜내는 억지웃음은 근육만 피로하게 한다. <순풍…>은 절대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로 유머를 끄집어내지 않는다(그래서인지 ‘오버’하지 말라는 대사가 심심찮게 나온다). <순풍>의 웃음은 직장 동료나 친구의 독특한 말투와 습관적 실수가 우리에게 일으키는 웃음과 성분이 동일하다. 이는 <순풍…>에 대한 진단들이 입모아 지적한 대로 성격 희극으로서 <순풍…>이 이룬 성과에 기인한다. 우리는 오 박사가 칭찬이라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태란은 죽어도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며, 창훈이 웬만한 천재지변에는 미동도 않는 남자라는 점을 숙지하고 있기에 연출자가 보내는 아주 작은 큐사인에도 데굴데굴 구를 수 있다. <순풍…> 이전의 시트콤들이 ‘엘리베이터에 나비넥타이 낀 사연’으로 웃겼다면, <순풍…>은 ‘엘리베이터에 아무개가 탔다’라는 설정만으로도 알아서 키들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이 열개의 상황이 주어진다면 <순풍…>은 상황에 인물 수를 곱한 가짓수의 에피소드를 가동할 수 있는 셈이다.

<순풍…>의 인물 묘사는 말 그대로 등신대(等身大)의 초상화다. 때로 우리는 직업이나 종교보다 어떤 반찬에 먼저 젓가락이 가느냐를 통해 한 인간에 관해 더 많은 진실을 간파한다. 이 점을 잘 아는 영특한 코미디 <순풍…>은 굵직한 사건과 무관한 ‘잉여분’의 조크를 통해 치밀하게 인물을 빚고, 거듭 정교하게 매만진다. 지난해 말 첫 등장한 창훈의 성격이 자리잡는 과정을 보자. 그는 순하지만 짓궂고 뭐든 대충 해도 남보다 월등하며 주변 돌아가는 데에 도통 무심한가 하면 사소한 일에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순풍…>은 대사로 새 인물을 브리핑하는 대신 매회 줄거리와 별 연관없는 창훈에 대한 정보의 파편을 슬쩍슬쩍 흘려넣었다. 면도하다 졸아 생긴 생채기나 병원 조회중에 딴짓하는 모습, 아수라장을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을 하나씩 접하며 시청자들은 종잡을 수 없는 이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히트작 <남자 셋 여자 셋>만 해도 캐릭터는 모범생/날라리의 거친 구분이나 외모, 극히 특수한 행태- 번개머리, 식탐 등 -에 기댔지 <순풍…>처럼 세밀화를 그린 적은 없었다.

"몽몽교? 우리는 순풍교!"

PC통신에 모인 <순풍…>마니아들

지난 2월20일. 재방송으로도 <순풍 산부인과>를 만날 수 없는 일요일 저녁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천리안 순풍 마니아 클럽(go spsp) 대화방에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웃긴가게(이영철) 새벽별(홍윤주) 샤샤(박윤진) 순풍사랑(이은지) 飮食男子(김대겸) 밍기뉴(이일수) 액션태란(우재성) 붕어다방(이명옥) 열정(이소희) 그리고… 휴와 샤랄라님이 함께 한 대화는 날을 넘겨 21일 새벽이 돼서야 끝이 났다. 99년 5월에 처음 뭉친 이들은 거의 첫회부터 빠지지 않고 본 광신도들. <순풍…>을 왜 보냐는 질문에 ‘전도하는 재미에’라는 대답을 서슴없이 하는 중증 환자들이었다. 제작진 자체적으로도 100회가 넘어갈 때마다 베스트를 선보이고 있지만 마니아들이 기억하는 베스트가 궁금했다.

붕어다방: 나는… 일주일 동안 일하러 왔던 임시의사의 관점에서 본 순풍 사람들 묘사.

샤샤: 그리고 몽몽교 교주로 윤기원이 나왔던 거.

새벽별: 김찬우랑 오중이가 조폭들 앞에서 <인디안 인형처럼> 부른 거, 순풍 광고 찍은 것두요. ‘순풍 산부인과’로 6행시, 부. 부은 게 아니다. 인. 인간이 들어 있는 게다. 과. 과연 그런 게다

웃긴가게: 당시에… 6행시 꽤 화제였죠…. 또 오징어맨, 오중이 슈퍼맨 옷 입고….

샤샤: 오지명 스토킹사건. 밤마다 전화기를 들면 헉헉 소리….

새벽별: <청춘의 덫> 패러디두 좋았어요. 김 간호사 방바닥을 길 때…. <쉬리> 패러디 때도 웃겼어요. 가리발디였죠, 암호명이.

샤샤: 윤기원… 맞다. 사람 죽여본 적 있냐고. 차라리 내게 밥을 먹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줘….

밤을 세워도 모자랄 듯 끝없이 에피소드들을 기억해내는 이들 중에 샤샤 와 새벽별은 ‘기억력 자매’로 통할 만큼 ‘순풍통’이다. TV 못 볼 사정이 생기면 주변 아무 텔레비전이라도 붙잡고 보고 그것도 힘들면 라디오(FM 87.75)로라도 듣고, 어느 순간부터 생각할 때는 혜교 내레이션 톤으로 생각한다는 이들은 그 연령대도 다양하다. 10대 부터 둘째아기가 뱃속에 있는 임산부까지…. 하지만 <순풍…> 앞에서만은 나이를 넘어 그저 열혈 시청자일 뿐이다.

새벽별: 근데 저는 요즘 <순풍…> 불만 중 하나가 내레이션의 남발이에요.

웃긴가게: 내레이션은 애전부터 많이 나오지 않았었나?

새벽별: 왕년에 영규님이나 김간의 내레이션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느낌이었는데 요즘의 오중이나 창훈을 통한 내레이션은 불필요하게 장면을 설명하기도 하고 혜교 내레이션도 극에 탄력을 주는 게 아니구 지루한 느낌이더라구요.

웃긴가게: 그러나 그런 대박을 계속 정형화해서 사용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가면서 좀 식상해지는 게 사실이지만.

새벽별: 이 또한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정답인 건 아니죠. 정형화해서 사용하는 건 순풍다움 같아서 좋은데 잘 사용되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아쉽다는 거죠.

마냥 치켜세우며 칭찬만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님을 아는 그들은(그냥 보는 사람들에겐 어떤 날은 재미있고 아닌 날도 있겠지만) 행여나 <순풍…>의 빛이 퇴색될까 걱정도 많았다.

샤샤: 진부한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게 순풍의 장기죠.

붕어다방: 인간감정이나 욕망의 노골적인 표현이… 무엇보다 강점이지 싶은데.

샤샤: 맞아, 한편의 철학서를 보는 듯해요.

그러나 이들의 대화도 참으로 순풍스러워서 이어지는 말의 엉뚱함이 가관이다

붕어다방: 진짜 아주 노골적이지 않아?

새벽별: 에로비디오 사건.

샤샤: 영규의 방구총 사건.

붕어다방: 영란의 빵 사건.

<순풍…>을 즐겨보는 마니아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이 언어의 벽은 참으로 높아서 보지 않는 이들 귀에는 목성어나 화성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루 30분이 아니라 24시간 순풍어(語)를 쓰는 사람들, 무거운 듯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진행된 이들과의 대화는 순풍에게 바라는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끝이 났다.

샤샤: 저의 한 가지 바람은 <전원일기>처럼 금동이 복길이가 훌쩍 커버리듯 그래도 좋으니 미달이랑 의찬이의 큰 모습도 그렇게 보고 싶다는 거예요.

밍기뉴: <왕룽의 대지>처럼 10년 뒤에 다시 뭉쳐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은데요(말이 되나?).

웃긴가게: 전 처음처럼만 했으면 합니다. 처음 오중의 그 토끼모양 종기로 사람을 죽이듯 웃겼듯이… 너무 착해지지 말구… 너무 반듯해지지 말구… 지금처럼… 조금 비딱하게… 조금 치졸하게… 그랬으면 좋겠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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