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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see] <번 애프터 리딩> 이 ‘멍청이’들을 즐겨봐
문석 2009-04-02

웃기고 뻔뻔한 코언 형제표 첩보물 <번 애프터 리딩>

조엘과 에단, 코언 형제는 장르 변주의 달인이다. 필름누아르를 교묘하게 뒤틀었던 데뷔작 <블러드 심플> 이후 코언 형제는 수많은 장르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다뤄왔다. 이들은 갱스터영화(<밀로스 크로싱>)나 할리우드 고전코미디(<허드서커 대리인>)는 물론이고 로맨틱코미디(<참을 수 없는 사랑>), 서부극(<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의 틀을 빌려왔지만 그건 결국 ‘코언 형제표 영화’에 다름 아니었다.

13번째 장편영화 <번 애프터 리딩>을 통해 코언 형제가 도전한 장르는 첩보물이다. 그렇다고 이 장르 특유의 음산하고 냉혹한 분위기나 ‘본 시리즈’ 같은 현대적 첩보물의 무한 액션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건 코언 형제의 영화니 말이다. 게다가 이들 필모그래피의 절반을 차지하는 코미디이므로 코언 버전의 007을 바란다면 당장 마음을 바꿔먹는 게 좋다. 그러니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코언 형제가 첩보물을 어떻게 만들었을까’가 아니라 ‘코언 형제가 이 장르를 어떻게 변주했는가’일 수밖에 없다.

꼬이고 꼬이는 엉성한 범죄계획

(명목상으로는) 스파이영화답게 <번 애프터 리딩>은 CIA 본부에서 시작된다. 해외 공작을 담당하던 중간급 요원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는 좌천됐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유는 그가 술을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오스본은 바로 사표를 던지고 CIA 활동을 정리하는 회고록 집필에 착수한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아내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그동안 계획했던 일을 실행에 옮길 때라고 판단한다. 그녀의 계획은 남편과 이혼하고 불륜 관계인 연방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결합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혼소송을 위해 남편 컴퓨터에서 재정기록을 복사해 이혼소송 변호사에게 넘긴다. 사건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 변호사의 비서는 이 기록을 CD에 옮겨 담았는데, 이를 헬스클럽에 놔둔 것이다. 헬스클럽 직원인 린다(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채드(브래드 피트)는 이 CD 안에서 담겨 있던 오스본의 회고록 일부를 발견하고 이것이 중대한 국가 비밀이라고 판단한다. 몸 전체를 성형하고 싶어하는 린다는 오스본을 협박해 성형수술 비용을 마련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스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이제 린다와 채드는 이 CD에 담긴 정보를 팔아넘기기 위해 위험한 작전에 돌입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줄거리에서 ‘국가 기밀이 담긴 CD를 둘러싼 치열한 사투’를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정은 영 딴판이다. 오스본은 3급 비밀 정도만 취급할 수 있었기에 이 CD 안에 담긴 정보는 거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린다와 채드는 그 사실을 깨달을 만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둘은 그동안 코언 형제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바보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속한다. 성형수술에 눈이 멀어 CD를 갖고 러시아대사관으로 향하는 린다와 그 옆에 붙어다니는 채드는 <위대한 레보스키>의 존 굿맨이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의 존 터투로보다도 멍청해 보인다. CD로 대박을 노리는 이들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어이없는 행동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러시아대사관에서 정보를 얻은 CIA가 이들과 주변 사람들을 감시하기 시작하고, 인터넷 데이트로 린다를 만난 해리와 린다를 짝사랑하는 헬스클럽 매니저 테드(리처드 젠킨스)가 얽히면서 상황은 더욱 꼬여만 간다.

이들만큼 바보 같지는 않지만, 엉성한 범죄계획이 뜻하지 않은 지경을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코언 형제 영화에 단골로 등장해왔던 요소다. 인질 교환을 위해 마련된 돈을 가로채건(<위대한 레보스키>), 장인으로부터 거액을 뜯어내기 위해 아내를 납치하게 하건(<파고>), 카지노 금고를 털기 위해 카지노 옆집 노파를 죽이건(<레이디 킬러>), 아내의 불륜상대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건(<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일은 항상 의도한 대로 되지 않고 때때로 끔찍한 비극까지 불러일으켰다. <번 애프터 리딩>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이 쫓고 쫓기는 빌미를 제공한 CD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돈가방이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드라이클리닝처럼 맥거핀에 불과하다. 공허한 CD 때문에 어설프게 시작된 금품갈취 계획은 금세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결국 이들의 영화에서 늘 그랬듯 몇개의 시체와 허무로 귀결된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의 바보 연기

물론 코언 형제는 <파고>나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그랬듯 널브러지는 시체를 앞에 두고도 뻔뻔하게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번 애프터 리딩>은 그 두 영화보다는 잔인하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구석이 많은 영화다. 그럼에도 코언 형제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특유의 블랙유머를 구사한다. CD를 전달받은 러시아 대사관 직원은 정보의 경중을 따지기에 앞서 “PC용인가요, 맥킨토시용인가요?”라고 묻거나, 우발적인 범죄행위에 불안해하던 해리가 자신을 감시하던 자의 정체를 밝히는 장면 등은 폭소를 자아낸다.

또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다. 린다와 채드는 말할 것도 없고 기관에서 사실상 잘린 뒤 회고록을 만들겠다고 허풍치는 다혈질의 오스본이나 아무 의미없이 여성용 자위의자를 만드는 해리 또한 백치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코언 형제는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이 “멍청이(knuckleheads)이지만 사랑할 수 없는 이들은 아니다. 우리는 배우들에게 자신 안에 있는 멍청이를 보듬어달라고 주문했다”고 설명한다. 영화의 후반부, 격분한 오스본이 테드에게 “나는 네가 누군지 알아. 너는 이 시대의 백치를 대표해…. 너는 이 저능아 집단의 일부야. 너는 내가 일생에 걸쳐 싸워온 바보들 중 하나야”라고 내뱉는 장면은 감독의 의도와 맞닿아 있는 대목.

<번 애프터 리딩>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점은 화려한 스타들의 출연이 아니라 그 화려한 스타들을 멍청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로 등장시킬 수 있는 코언 형제의 능력이다. “나는 코언 형제의 어떤 영화라도 그들이 제안한다면 기꺼이 출연할 것이다. 그들이 더러운 구정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틸다 스윈튼의 말처럼, 이들 짱짱한 스타들은 모두 코언 형제와의 협업을 위해 스스로 ‘바보 연기’를 택했다.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와 <참을 수 없는 사랑>에 이어 코언 형제와의 ‘바보 3부작’을 완성하게 된 조지 클루니는 “나는 이 캐릭터처럼 이상한 듯 느껴지기도 했다. 약간 낙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브래드 피트가 스판덱스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보고 난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고 농담했다. 물론 모든 배우가 덜떨어진 인물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코언 형제는 틸다 스윈튼을 제외한 모든 주요 배우들을 각각의 캐릭터로 정해놓은 상태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했는데, 브래드 피트는 “코언 형제가 나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시나리오를 읽고 칭찬받은 건지 모욕당한 건지 아리송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번 애프터 리딩>은 첩보물의 지엽적인 요소만 빌려온 코언식 영화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맞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이다. 인공위성의 시점에서 CIA 본부로 수직하강하는 앵글로 시작했다가 그 반대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첩보물에 대한 코언 형제의 변주임에 틀림없다. 정보기관이나 정보원 따위의 요소 외에도 코언 형제가 이 영화 안에 끌어들여온 첩보물의 클리셰는 음악이다. 전형적인 첩보영화에 사용될 법한 긴장감 넘치는 타악기 리듬의 음악은 어울리지 않는 장면과 만나면서 괴이한 소격효과를 발휘한다. 긴박한 상황이 발생할 듯 둥둥거리는 음악과 함께 주인공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스파이영화 속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작곡자 또한 (스파이영화를 만든다고) 착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게 음악감독 카터 버웰의 말이다.

어쩌면 ‘이 시대의 진정한 첩보영화’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코언 형제가 생각하는 ‘지금 이 시대의 진정한 첩보영화’인지도 모른다. 조엘 코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영화는 직업에서나 개인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위기를 맞이한 중년들이 국가안보 문제를 건드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것이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게 했다. 이건 CIA와 피트니스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가 교차하고 충돌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다룬다.” 결국 <번 애프터 리딩>을 첩보물로 만드는 진짜 요소는 CIA나 국가 기밀처럼 은밀한 영역에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의 평범한 삶에 깃들어 있다. 린다와 채드가 꾸민 엉뚱한 음모에 연루됐건 그렇지 않건,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감시당한다. 촬영감독 에마뉘엘 루베츠키가 망원렌즈로 잡아낸 이 감시하는 자의 시점은 코믹한 분위기에 묘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들이 정체 모를(나중에는 정체가 밝혀지지만) 시선에 포위된 건 미국의 중년들이 겪고 있는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 인물들은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와의 불륜을 꿈꾸거나 행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이혼 기회를 노린다. 그 원인이야 복잡한 분석이 따로 필요하겠지만, 어쨌거나 그건 각자에게 국가 기밀보다 훨씬 귀중한 특급비밀이며, 상대가 눈치챌 수 없도록 꽁꽁 숨겨놔야 하는 극비사항이다. 자신의 비밀을 보존하고 남의 비밀을 파헤치는 게 첩보원의 임무라면 등장인물 모두 첩보원일 수밖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지언정, 머저리 첩보원들을 위한 나라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이 아주 멀리 있지는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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