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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시인, 피의 묵시록을 쓰다
김용언 2010-01-07

<더 로드>의 코맥 매카시… 영화화가 힘든 그의 소설을 할리우드가 탐내는 까닭은

이상하다. 존 힐콧이 정성스럽게 완성한 <더 로드>의 대사는 원작 소설에 쓰인 그대로이고, 감독은 일견 단조롭게 반복되는 여행의 여정을, 보는 이의 숨이 턱 막힐 만큼 암울한 지구 멸망 이후의 순간을 솜씨 좋게 되살려냈다. 그런데 뭔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뿐 아니라 그의 소설들 전반적으로)는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 텍스트다. 대화는 극히 적다. 작가는 그저 묵묵히, 남쪽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고난을 묘사한다. 여전히 불타는 숲과, 얼음장 같은 냇물과, 이제는 회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바다와, 무너져내린 집들 사이를 지나치는 그들의 고난에선 설명이나 가공이 중요하지 않다. 보여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혀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강철 같은 냉혹함과 더할 나위 없는 보드라움을 오가는 그 미묘한 진동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것인가.

<더 로드>

<더 로드>

영화 <더 로드>는 그 지점에 쉽게 다다르지 못했다.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책에 드문드문 등장하는 사건(이라기엔 거의 짧게 스쳐지나가는 삽화 같은, 그러면서 그 순간적이고 느닷없는 등장이 안겨주는 감정적 동요가 무척 크다)을 전부 영화에 담았다. 그러나 그 순간순간 사이에 들어가는 ‘보여주기’ 기법이 빠지는 순간, 할리우드영화의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이 작고 시적인 장면들이 주는 감동이 에피소드별로 헐겁게 이어붙여졌을 때 드는 느낌은 생경함이다. 결국,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그대로’ 옮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빌리 밥 손튼이 <모두 다 예쁜 말들>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고, 존 힐콧 역시 어떤 지점 이상 나아가질 못했다.

은둔하며 오로지 글을 위해 살다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코맥 매카시라는 거대한 성채를 향한 영화계의 끊임없는 구애의 원인이 뭘까. 코맥 매카시라는 작가는 대체 누구인가. 그는 언제나 ‘J. D. 샐린저 이후 가장 유명한 은둔 작가’라는 수사구로 장식된다. 1933년에 태어났고, 현재 76살이다. 원래 이름은 찰스 주니어 매카시, 그러나 나중에 게일어로 ‘찰스’를 읽는 명칭인 ‘코맥’으로 이름을 바꿨다. “수많은 하녀들이 바삐 움직이는 크고 하얀 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내내 변호사 아버지의 권위와 그리고 학교 제도와 불화했다. “나는 부모님이 원하던 그런 애가 아니었다. 내가 존경받는 시민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일찍부터 깨달았다. 학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학교를 증오했다.” 테네시대학을 그만두고 1953년 공군에 입대하여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알래스카에 배치된 매카시는 그때 처음으로 독서를 시작했다. 그는 1959년 대형 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내 능력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단지 글쓰기로 어떻게 먹고살지만 알아내면 되었다.” 첫 소설 <과수원지기>가 출간됐고 단숨에 평론가들의 주목을 끌었다.

두 번째 소설 <외부의 어둠>(1968)은, 예수 탄생에 얽힌 뒤틀린 가학 버전이다. 오빠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를 찾는 소녀의 비극을 다룬다. <신의 아이>(1973)는 연쇄살인범이자 시체애호증 환자였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매카시는 이 끔찍한 악당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이론도 제공하지 않는다. 매카시는 그를 위한 자비를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공감하고 그에게서 유머를 발견한다. <뉴요커>는 그를 그리스 비극작가와 중세 모럴리스트에 비하면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자주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작가 마이클 샤본은 “매카시는 시체애호증과 도착증과 유아 살해를 거래하는 작가다. 그중 한권을 읽는다는 건, 호러소설가이자 구역질나는 예술가인 매카시가 피에 흠뻑 젖은 영혼의 대합창을 들려주는 방식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힌다는 뜻이다”라는 한숨 섞인 찬사를 바치기도 했다. 1979년에는 거의 20년 동안 써왔던 네 번째 장편이자 매카시의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한 <서트리>(1979)가 출간되었다. 주인공 서트리는 성공한 아버지에게 완강하게 저항하고, 더러운 도시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으며, 술과 파티의 끝없는 도취에 스스로를 맡긴다. “나는 언제나 모험적인 삶의 방식을 즐기는 이들에게 매혹되어왔다.”

피칠갑된 서부의 역사를 새로 쓰다

현재 매카시의 명성을 드높이게 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는 <핏빛 자오선>부터였다. 그는 여기서부터 한물갔다고 여겨지던 웨스턴 문학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핏빛 자오선>은 1849년부터 50년까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끔찍한 실화에 기초한 작품이다. 주인공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고지대와 험준한 산맥과 신이 손수 빚은 지옥 같은 사막을 정처없이 떠돈다. 인디언들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멕시코 정부에 고용된 미국인 용병들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평범한 민간인들을 학살하며 그들의 머릿가죽을 벗기고 여자들을 강간한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멕시코의 무시무시한 대자연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거의 분단위로 묘사하며, 그 와중에 드문드문 벌어지는 추적과 우발적인 싸움, 눈알을 뽑고 성기를 자르고 불에 태우는 고문이 전혀 감정 섞이지 않은 어조로 이어진다. 또한 이후 매카시 문학의 주된 구도인, 거대한 악 앞에서 굴복하거나 파멸하고 마는 선한 소년과, 어찌 보면 니체적 초인이자 어찌 보면 인간이 흙으로 빚어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궁극적인 악 그 자체인 불가해한 존재의 치열한 싸움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악의 대변자 ‘판사’는, 마치 전쟁의 신인 듯 사막 한복판에, 교회 설교당에, 화산 꼭대기에 느닷없이 나타나 모두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고 누군가의 죽음을 가져온다. “전쟁의 피에 자기 자신을 오롯이 바친 사람만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생한 공포를 맛보고 급기야 참된 영혼으로 공포와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 자만이 진정한 춤을 출 수 있네.” 아마도 이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커츠 대령 정도일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책을 두고 “<일리아드> 이후 피로 가장 흠뻑 젖은 책이다”라고 평했다.

왜 웨스턴으로 선회했느냐는 질문에 매카시는 “난 언제나 남서부쪽에 관심이 있었다. 남서부는 카우보이와 인디언, 서부의 신화에 대해 모른다면 갈 수 없는 그런 곳이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아무도 미국 남서부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의 소재라면 코카콜라, 카우보이, 인디언이다. 하지만 지난 200년 동안 아무도 그 역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핏빛 자오선>이라는 무지막지한 ‘피투성이 인류전쟁사’를 완성한 다음, 매카시는 웨스턴 연대기 ‘국경 3부작’을 쓰기 시작했다.

<모두 다 예쁜 말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모두 다 예쁜 말들>은 1949년 무렵, 미국을 떠나 멕시코에서 말조련사가 되려 했던 소년 존 그래디의 신비롭고 격렬한 모험담을 그린다. 멕시코의 쓰라린 역사와 존 그래디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가 겹쳐지면서, 거의 서정적이라 할 만한 아름다움으로 폭력을 다루는 솜씨는 어떤 경지에 다다랐다. “이 세계를 사랑함에도 이 세계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세계의 아름다움 속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심장은 끔찍한 희생을 바탕으로 뛰는 것이며 세계의 고통과 아름다움은 각자 지분을 나눠 가지는데, 끔찍한 적자로 허덕이는 와중에 단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어마어마한 피를 바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국경을 넘어>는 확연히 다르다. <모두 다 예쁜 말들>의 아련하게 아름다운 노스탤지어, 비통한 서정이 깃든 멕시코와는 딴판의 멕시코를 보여준다. 멕시코에서 온 늑대를 사로잡게 된 소년 빌리 파햄은 자신도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늑대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로 한다. 그러나 늑대는 죽고, 소년은 자신의 영혼 일부도 멕시코에 버린다. 중간중간, 길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가 끼여든다. 폐허가 된 성당에서 신과 대결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에피소드에 비견할 만하며, 눈먼 남자가 깨닫는 ‘보이지 않는 세상’ 이야기와, 집시가 들려주는 추락한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읽는 듯한 기시감을 안겨줄 정도로 삶에 대한 비전을 통렬한 우화로 형상화한다. 3부작 중 최고 걸작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 “정의로운 자는 악에 대한 무지로 인해 매번 모퉁이에서 비틀거리지만, 악한 자에게는 어둠이든 빛이든 똑같이 명백하게 보인다는 것 또한 그는 모른다.”

존 그래디와 빌리 파햄이 만나는 마지막 작품 <평원의 도시들>은, 3부작 중에선 평작이다. 그러나 에필로그만큼은 단독적인 광채를 뿜는다. 마지막 40페이지가량에서 매카시는 소설의 존재 가치에 대해, 지옥 같은 삶에서도 사람들이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읊조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아름다운 변호를 펼친다. “세계에 대해 말하는 힘이 우리에게서 사라진다면 세계의 이야기도 실마리를 잃고, 그에 따라 권위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다가올 세계는 지난 세계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다른 재료는 없지요.” 매카시는 ‘국경 3부작’을 통해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이제는 완전히 잊혀져버린 세계의 완벽한 지도를 부활시켰다. 그는 신이 자신의 형상에 비추어 흙으로 인간을 빚어냈듯, 거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삶의 단면을 도려내어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삶의 흐름을 담아냈다.

<더 로드>, 아들과 함께(?) 쓰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매카시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중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코언 형제가 원작을 완벽히 이해하고 소설의 영역을 영화적 문법으로 노련하게 재해석한 덕분일 수도 있다. 또한 어쩌면 이 작품이 매카시의 전작에 비해 훨씬 쉽고 명확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윌리엄 포크너나 허먼 멜빌, 제임스 조이스에 자주 비교되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작품은 헤밍웨이와 닮았다. 40년대 하드보일드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간결한 문장, 빠른 속도, 지금까지 결사적으로 치중했던 배경 묘사만큼이나 대사로 인물을 묘사하기 등 새로운 시도들이 불멸의 악당 안톤 시거(스티븐 킹은 ‘미국 문학사상 최고의 악당 베스트10’에 안톤 시거를 당당히 올린 바 있다)를 빚어냈다. “어떤 기분인지 알 듯 모를 듯했다. 슬펐지만 다른 감정도 섞여 있었다. 그 다른 감정 때문에 그는 시동을 거는 대신 가만히 앉아 있었으리라. 그는 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것은 패배였다. 영락없는 패배였다.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 극복해야 해. 그가 말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하는’ 아버지의 비전을 보는 벨 보안관의 꿈은 <더 로드>(2006)로 이어진다. <더 로드>가 출간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충격받았다. 지금까지 인간의 영혼을 정복하는 악의 인과관계에 몰두하는 듯하던 매카시가 처음으로 ‘선을 좇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 누가 찾아주죠? 누가 그 아이를 찾아요?” 소설 속 아들이 질문하자 아버지가 답한다. “선이 꼬마를 찾을 거야. 언제나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매카시는 60대 후반에 얻은 어린 아들 존을 위해 <더 로드>를 썼다고 했으며, 존이 <더 로드>의 공동저자라고까지 표현했다. “소설 속 수많은 문장들은 아들 존과 내가 나눈 대화를 옮긴 거다. 책 속 소년처럼 존이 내게 물었다. ‘아빠, 내가 죽으면 어떡할 거예요?’ 나는 답했다. ‘나도 역시 죽을 거다.’ ‘나랑 같이 있을 수 있게?’ ‘그래, 너와 같이 있을 수 있게.’”

21세기에 가장 희귀한 미국 작가

“피범벅이 되지 않은 삶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이 어떤 식으로든 진보할 수 있다는 인식,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위험하다. 이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영혼과 자유를 가장 빨리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노예가 되거나 얼간이가 된다.”(코맥 매카시) 참을 수 없는 팬시함과 근거없는 낙관주의와 다행증(多幸症)으로 넘쳐나는 시대에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무정한 염세주의자다. 악을 엄밀하게 탐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선을 발견하고자 하는 구도자. 그렇기 때문에 매카시가 그리는 인간은 죽음 앞에 선 인간, 죽음을 달고 다니는 인간 혹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건 무책임하거나 비윤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와 더 나아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의 폭력적 기원과 비극적 원년이 원래 그러했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전설과 음산한 욕망과 끈질긴 기억의 힘으로, 죽음까지 넘어서려 하는 어떤 의지와 힘을 고찰하는 코맥 매카시는 21세기에 살아남은 가장 희귀하고 존귀한 존재다.

영상으로 만들어진 매카시의 작품들

사랑했지만 잘 만들지는 못한…

코맥 매카시는 문학을 사랑하는 영화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지만, 영화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2000년 <모두 다 예쁜 말들>이 만들어졌다. 빌리 밥 손튼이 연출했고, 맷 데이먼과 페넬로페 크루즈가 출연했다. 빌리 밥 손튼은 <모두 다 예쁜 말들>을 두고 “내가 매카시만큼 좋은 작가였다면 쓰고 싶었을 종류의 그런 책”이라는 경탄을 바쳤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스크린으로 그대로 옮기려는 과욕을 부렸다. 원래 버전은 3시간이 넘었고, 질겁한 영화사는 2시간 정도의 새 버전을 강요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평범한 로맨스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7년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9년 <더 로드>에 이어 2010년에는 <HBO> TV영화로 토미 리 존스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선셋 리미티드>가 대기 중이다.

토미 리 존스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출연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로 “에드 벨을 묘사하는 매카시의 언어는 그저 아름답고, 진심으로 해볼 만한 무언가를 품고 있다. 나는 벨과 공통점이 없지만, 내가 벨과 똑같다고 매카시가 생각할 것이라는 유혹도 컸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리틀 칠드런>으로 격찬받은 토드 필드가 <핏빛 자오선>을 준비 중이고, <평원의 도시들>은 앤드루 도미닉이 꿰찼다. <차퍼>와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을 연출했던 도미닉은 매카시의 세계와 썩 잘 어울린다. 숀 펜도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찰스 부코스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존 스타인벡, 윌리엄 사로얀, 코맥 매카시를 꼽은 바 있다. 숀 펜은 한때 <신의 아이>와 <평원의 도시들> 영화화를 고려하기도 했다. 브래드 피트 역시 공공연한 매카시의 광팬이며,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던 <모두 다 예쁜 말들>의 오디오북을 녹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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