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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연의 음악’으로의 초대
김혜리 사진 최성열 2010-06-24

- 홍상수 감독의 아주 특별한 연기 연출의 비밀… 고현정, 유준상, 이선균이 말한다

#4. 시시콜콜 연출

홍상수 영화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대사와 디테일은 상황만 주고 즉흥 연기를 시키는 게 아니냐는 짐작을 부르곤 한다. 그래서 현장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토씨 하나 바꾸지 못하게 하고 목소리의 음량, 1초 당기고 늦추는 타이밍까지 철저히 주문하는 홍상수의 연출방식에 크게 놀라고 만다. “앞문장이 뒷문장을 밀어가는 식으로”, “말을 말 같이 해야 한다” 등의 지시가 들려온다. 그의 연출은 영화에 대한 배우의 지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연출이 아니라 단순한 행동을 부르는 연출이다. 무슨 말을 하고 몸짓을 할지는 엄격히 결정돼 있는 반면, 주류 극영화에서와 같은 굵직한 감정의 흐름은 지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우는 불현듯 성격의 뼈대, 사람의 모양새 같은 것을 드러낸다. 이는 영혼 같은 것과는 무관하며 홍상수 감독이 찾고 있는 바도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 탐구 다큐멘터리나 인터뷰에서도 목격하지 못했던 한 배우의 순수한 핵심을 픽션인 홍상수 영화에서 맞닥뜨리곤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첫 테이크를 찍은 뒤 감독님이 서른네 가지 정도를 이야기했다. 모니터를 1초 플레이한 다음 여기서 이 배우가 저리로 움직이고 말을 받으면 젓가락을 들고 건배하고 있다가 이러저러하게 하라는 식이었다. 그걸 다 외워야 했다. 다섯 테이크가 지나자 다시 불러 추가로 스물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순간, 내가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끝나는 상황을 맞이하겠구나 하는 긴장감이 들어, 잠시 바깥에 나가 기합을 넣었다.”(유준상)

“대사를 못 고치게 하는 건 굳이 배우 편의를 안 봐주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말 하나가 바뀌면 그 뒤가 연달아 말이 안되는 대사라서다. 홍 감독님의 세세한 연기 지시는 새로운 걸 수십 가지 익히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쓸데없는 짓거리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안 해야 될 것과 꼭 해야 될 것을 반대로 알고 있던 것을 알려주시는 거다. 완전히 새로운 행동을 외워야 한다면 짧은 시간에 불가능하겠지만 어린 시절의 자연스러웠던 나의 움직임, 잊고 살았던 무엇을 일깨워주는 지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현정)

“그런 식의 연출에 따라 수십 테이크를 넘어가면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의식이 사라지고 마침내 연기 이전에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다 ‘자 됐습니다. 끝’이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기분이 멍해진다.”(유준상)

“결국 그 장면과 호흡만 중요할 뿐,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은 사라진다. 그건 굉장히 편하다.”(이선균)

#.5 생활의 발견, ‘아는’ 배우의 미덕

앨프리드 히치콕은 배우를 찢어버릴 수 있는 월트 디즈니를 부러워했다고 전해진다. 배우는 없고 삶에서 포착된 모델의 사용만 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로베르 브레송은 배우에게서 개별적 의향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풍문일지 몰라도 그들은 배우를 사랑하거나 그들의 재능에 의지하진 않았던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은 그들의 대극에 있다. 그는 훌륭한 배우를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 배우와 인간적으로 친밀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가능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배우 안에 있는 것과 그날 그 장소에 우연히 존재하는 기운을 모아 배열해나간다. 때문에 그가 선택하는 배우들은 역할에 잘 들어맞는 연기자이기에 앞서 그가 가까이 두고 삶의 시간을 공유하고 싶은 “좋은 사람, 예쁜 사람, 착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이유의 일부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12편의 중·장편영화를 찍는 동안 여러 배우들과 두 차례 이상 만났다. 배우 김상경, 이선균, 정유미는 홍상수 영화를 세편 찍었다. 일주일에 이틀, 정해진 요일에 네명의 스탭과 함께 감독이 출강하는 학교 근처에서 규칙적인 일과처럼 촬영한 <옥희의 영화>의 제작방식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홍상수의 생활과 영화 만들기는 한 줄기로 수렴해가고 있다.

“처음 홍 감독님을 만난 날 네 시간 동안 낮술을 마시며 할 말이 바닥날 때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했다. 조감독이 말하길 많은 배우들이 왔다 갔는데 이렇게 오래 술을 마신 일은 처음이라고, 아무래도 캐스팅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는데 다른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보도를 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난감했다. (웃음) 그리고 2년이 흐른 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출연 제의를 받았다. 기뻤다.”(유준상)

“시간과 함께 감독인 나도 배우도 자연히 변한다. 과거와는 다른 것을 배우에게서 원하고 다른 배우를 찾기도 한다. 한 사람 안에는 많은 결이 있고 앙상블의 조합에 따라 쓸 수 있는 결도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배우를 반복 기용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몇해 전 어떤 배우에게 막연히 함께하자고 했던 이유를 뒤늦게야 깨닫기도 한다.”(홍상수)

“비전문 배우에게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과 제한이 있다. 일단 카메라 앞에서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 해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한다. 배우의 움직임이 서툴고 느리면 내가 거기 맞춰야 한다. 배우란 굉장히 어려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보유한 힘이 다르다. 내가 끄집어내는 방식이 통상과 다르기 때문에 배우 자신은 ‘내가 과연 연기를 했나?’라고 느낄 수 있지만 분명히 연기한 거다. 전문 배우들과 하면 내가 그때그때 원하는 속도로 갈 수 있고 앙상블도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고 에너지의 레벨도 뜻대로 올렸다 내릴 수 있다.”(홍상수)

“로베르 브레송은 전형화된 할리우드식 연기에 반발한 나머지 관념적으로 흘러 공식 같은 것을 만든 것 같다. 배우를 꼼짝 못하게 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하면 순순한 무엇이 나올 거라고 여기고 식물처럼 연기하길 바랐다. 그러나 배우란 살아 있는 사람이며 그 안의 힘과 재능이 약동해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인간에겐 자극이 필요하고 자발적인 움직임을 일으킬 동기도 필요하고 끼도 필요하다. 그것을 살리는 가운데 할리우드 액팅을 제거해야 한다.”(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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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다혜 디자인 김차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