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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결정론적 운명관과 강한 긍정 사이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를 보는데 초반부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무슨 얘기인지 대충 가늠할 수는 있었으나 영화 속 외계인의 언어를 해독하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에 우주선들이 나타나자 언어학 박사인 루이스 뱅크스가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와 함께 미군의 요청으로 헵타포드라 이름붙인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으로 서두를 여는 이 영화는 언어에 대한 우리의 기존 상식을 넘어서는 곳에서 언어를 생각하게 한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분석하는 도중에 그게 매우 기이한 형태임을 알게 된다. 표의문자나 표음문자가 아니라 문장이 없는 비음운적 문자로서 문자 하나가 완결된 의미를 지니는 언어이다. 가장 헷갈리는 것은 헵타포드의 언어가 비선형이고 비음운이라서 그들의 사고체계도 시간의 순차에 따라 이뤄지는 게 아니라 동시적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경험되는 체계이다. 그들의 언어체계를 습득한 루이스 역시 그들과 같이 비선형적 시간경험을 함으로써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위치하게 된다.

접수라는 개념 없이 접촉하려는 시도

이게 말이 되는 설정인지 일단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헵타포드의 언어 해독 과정을 보여주는 초·중반의 전개는 느리게 흘러갔다. 간간이 루이스의 회상 장면이 끼어드는데 도입부를 제외하면 간헐적이어서 그게 또 서사에 무슨 복선이 되는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대충 헵타포드의 언어체계와 시간개념에 대해 관객으로서 체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무렵부터 회상 장면이 좀더 자주 끼어드는데, 대략 1시간가량의 상영 분량이 지난 다음이다. 순차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한 언어체계를 가진 주인공 루이스가 비순차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한 언어체계를 습득하자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게 곧 이 영화 <컨택트>의 후반부 내용이다. 이때부터 나는 망치로 얻어맞는 것처럼 관객으로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말로 환원하기 힘든 것을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이미지로 줄기차게 표현하는 방식인 데다, 극장 바깥의 우리의 실재를 가리키는 현상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감동적이었다.

에이미 애덤스가 연기하는 루이스 박사는 미군 대령으로부터 저들 외계인들이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달라는 임무를 받는다. 외계인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그들의 언어를 알 수 없으니 왜 온 것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다. 헵타포드는 지구인들이 알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불안감을 준다. 앎의 대상이 아니며 앎을 수행하는 것도 힘들다. 루이스와 이안은 그들이 접촉하는 두 헵타포드에게 (코미디언의 이름에서 따온) 애보트와 코스텔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친근하게 접촉을 시도하는데 이들의 접근방식은 그들 주변의 군인들과 확연히 다른 것이다. 루이스의 동료 이안 도넬리는 헵타포드에게 걷다, 라는 동사를 알려주기 위해 그 스스로 걷는 시늉을 한다. 마치 서구 문명인들이 오지의 원주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동작을 흉내내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알려주는 방식이다. 루이스가 취하는 행동도 언어학자가 소수민족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헵타포드의 음성을 녹음해 음향 패턴을 분류한 다음 특정한 동작이나 사물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의 문자와 음성을 받아내어 다시 분석한다.

루이스와 이안의 노력은 주변으로부터 부질없다는 완곡한 비난을 받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 내부의 언어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난다. 미군 수뇌부는 언어의 상호 습득 과정에서 우수한 인종이 늘 상대방을 전멸시켰다는 역사적 증거를 상기시킨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과거 서구인들이 정복했던 비서구인 원주민들의 운명을 밟지 않을까 염려한다. 이는 미군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 등의 입장과도 통하는 것이어서 루이스 일행이 외계인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기간 동안 지구 곳곳에는 한시라도 빨리 외계인이라는 적을 섬멸하자는 전운이 감돌고 각지에서 공격을 촉구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상대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편은 질 수밖에 없다는 전투적 언어관의 소산이기도 한데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어느 쪽이 이기느냐를 가르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설득시켰다는 것은 상대를 논리로 굴복시켰다는 것이고 상대에게 설득당했다는 것은 상대에게 논리로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외형적으로나마 타자가 동일자가 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언어라는 것은 세계를 특정한 규칙의 기호로 접수한다는 것이고 이는 세계 그 자체와는 근본적으로 관계가 없다. 사과라는 한국어 표음문자는 실재하는 사과를 지칭하는 기호의 약속일 뿐 그걸 발음하는 소리와 글로 쓰는 문자가 세계에 실재하는 사과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니다. 언어로 사과를 사유한다는 것은 한국말이라는 특정 표음문자 체계 내에서 정의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시를 비롯한 예술이라면 이 환원적인 정의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물질 자체의 경험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쓸 것이지만 실제 삶에서 언어를 통한 환원적인 정의는 늘 불가피하다.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 일행과 외계인의 소통은 환원적인 언어체계 너머에서 이뤄진다. 표음문자의 이전 단계인 상형문자를 통한 소통과 비슷하게 그들은 서로를 흉내내면서 각자 다른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뭔가 뜻을 교환하려 애쓴다. 아까 언급한 이안의 걸음걸이 흉내를 비롯해서 그들은 유리 장벽을 마주하고 손과 손을 맞대고 교감하는 것까지 포함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이는 타자를 타자 그대로 놓아두고 접수라는 개념 없이 접촉하려는 절실한 시도로 관객에게 느껴진다.

이 과정에 계속 끼어드는 것이 루이스의 회상 장면이다. 루이스는 딸이 있었고 그 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루이스가 회상 장면에서 자신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누구지?’라고 루이스는 스스로 질문한다. 루이스가 외계인과 접촉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교대로 컷되는 회상 장면은 아이를 통해 벌레를, 돌멩이를 감각하는 루이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루이스와 외계인의 접촉과 루이스가 아이를 통해 사물을 감각하는 장면들은 모두 약속된 기호의 논리인 언어적 경험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루이스가 자신의 언어로는 외계인의 마음을 접수할 수 없는 것처럼, 루이스의 딸에 대한 기억은 언어로 접수될 수 없는 트라우마이다. 그것은 어떤 언어로도 접수될 수 없는 형상 그 자체로 자리하고 있어서 루이스가 처음에는 이 아이가 누구인가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이 회상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회상 장면이 아니라 미래 장면이 아닐까 관객 입장에서 의심하게 되는데 헵타포드의 언어체계를 통해 동시적 시간성을 체험하는 루이스가 보게 되는 미래의 모습이라는 것이 차츰 밝혀지기 때문이다.

네 삶 너머에도 너는…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된다. <컨택트>의 이야기의 도입부는 루이스가 미군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는 것이었으므로 관객인 우리는 당연히 루이스의 회상 장면이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의 후반 회상 장면에 루이스가 자기 집에 배달된 저서를 열어볼 때 우리는 루이스가 헵타포드의 언어에 관한 책을 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장면은 헵타포드 사건이 종결된 이후의 시점이다. 그 책의 앞면에 딸에게 바치는 서명이 있다는 걸 보게 되면 이제까지 우리가 루이스의 과거 트라우마로 받아들였던 딸의 죽음이 영화의 주된 서사 이후에 발생된 일이라는 걸 또 알게 된다. 임무 수행 중에 친해졌던 이안은 루이스의 남편이 될 남자였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은 원작 소설에서는 이 시제가 훨씬 간명하게 전개된다. 두개의 서사가 묶이는데, 루이스가 외계인과의 접촉 과정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를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오르게 되는 동안, 미래의 자신의 딸에게 말을 거는 형식의 이야기가 붙는다. 후자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시제는 미래형이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될 것이 영화에서는 간단하지 않게 붙어 있다. 영화라는 현재형의 시제는 지금 보여지는 것을 과거형으로 만든다. 알랭 레네가 <히로시마 내 사랑>(1959)에서 처음 현재와 과거를 구독점 없이 점프컷으로 이어붙였을 때 그건 현재에 침투한 과거의 삶, 다른 이들의 현재와 다른 주인공의 고립된 시간을 형용하는 것으로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이 영화 <컨택트>에서의 시제를 구분하는 구독점 없는(회상 장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플래시포워드는 현재에 개입하는 미래라는, 상상하기 힘든 영화적 경험을 안겨준다. <히로시마 내 사랑>이 현재를 규정하는 과거라는 인과적 설명이 아니라 현재에 붙어 있는 과거라는 동시적 경험을 전해줌으로써 충격을 줬다면 이 영화는 현재와 공존하는 미래라는 결정론적 세계를 보여준다.

지금 루이스는, 어느 시점에 있을까, 그게 중요하긴 한가

영화의 상영시간이 상당히 흐른 다음에도 나는 이 영화에 서브플롯이 없거나 희미한 줄 알았다. <미지와의 조우>(1977)와 비슷한 설정으로 시작한 다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비슷한 절정부로 치닫는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적 서브플롯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용한다. 가족 멜로드라마를 미지의 존재와 접촉하는 경이감과 숭고미를 통해 고양시킨 <미지와의 조우>나 가족 멜로드라마를 아예 배제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달리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는 동시적 시간관을 취하되 결정론을 위배하지 않음으로써 종래의 멜로드라마적 해피엔딩과는 다른 것을 추구한다. 달리 말해 미래를 아는 주인공이 미래의 결과를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미 봐왔던 대로 루이스의 딸은 죽을 것이다. 그걸 바꿀 방법은 없다. 다르게 살고 더 많이 노력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 대신 루이스는 딸에게 놀라운 말을 한다. 네 삶 너머에도 너는 존재할 수 있다고. 이 스토리에는 처음과 끝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 말을 하는 루이스는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존재하는 것인가. 애석하게도 그건 알 수 없다. 루이스의 사고 패턴을 좇자면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사고 패턴을 따라 시간은 한쪽으로 흐르지 않고 처음과 끝은 더이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말미에는 놀라운 대사가 나오는데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루이스는 딸 한나의 이름이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같기 때문에 매우 특별하다고 딸에게 일러준다.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은 한나의 이름처럼 이 스토리는 처음과 끝이 없고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반복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너무 많은 언어들로 인해 무너진 바벨탑의 우화와 정반대 지점에 자리한다. 루이스가 외계인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호전적인 중국의 샹 장군과 통화했을 때 그가 전한 내용은 장군의 아내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는 의미가 없다. 장군은 그 말이 아내의 유언이었기 때문에 감동했으며 그로 인해 전쟁을 포기했다. 타자의 고통을 재생하는 언어, 설득이 아닌 공감의 언어, 원인과 결과가 없는 언어, 이것들은 현재와 미래가 섞였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세계관을 장착하게 해준다. 이 영화는 결정론적 운명관에 좌우되는 듯하면서도 그걸 당당하게 견디는 강한 긍정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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