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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기행②] 이현정 감독의 제18회 선댄스영화제 기행
글·사진 이현정(영화감독) 2018-02-19

유타에서 영화와 맞은 겨울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저녁 나는 솔트레이크공항에 도착했다. 올해 선댄스영화제가 열리는 파크시티까지는 40분가량 더 가야 하는데 내리자마자 마음이 무거웠다. 지난해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폭설이 내리던 밤. 폐차 직전의 낡은 차에 할아버지 택시기사. 지난해 처음으로 유타에 발을 내디뎠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을 뚫고 사막의 고개를 과연 넘을 수 있을지 내내 마음을 졸였다. 눈길에 바퀴는 계속 헛돌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동차는 산 고개를 힘겹게 넘어가고 있었다. 산 중턱에서 밤을 새우게 되는 건 아닌지, 눈은 언제쯤 그치려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다행히 선댄스영화제가 열리는 파크시티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엄청난 폭설로 인해 내가 가야 하는 도로는 진입이 통제됐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큰 트렁크를 끌고 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택시기사 할아버지는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내가 갈 집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면 자기가 20달러를 준다고 했다. 택시비 40달러의 절반이다. 다행히 젊고 발랄한 흑인 여자친구가 나를 도와주었다. 물론 돈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영화감독 지망생으로 시카고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울퉁불퉁한 눈길을 걸었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남자들이 들어야 할 때

올해 선댄스영화제의 키워드는 ‘#MeToo #TimesUp’. 선댄스영화제를 만든 로버트 레드퍼드는 “이제 남자의 역할은 듣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댄스영화제는 현재 영화제가 열리는 파크시티에서 65km 정도 떨어진 선댄스라는 지역에서 랩(Lab)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만이 굳건히 영화를 대표하고 있었고, 오직 이익 추구만이 유일한 목표였다. 경계에 내몰린 새로운 목소리, 위험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는 뜻이 맞는 제작자와 에디터 그리고 감독들과 1980년 선댄스 랩을 먼저 시작했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선보일 곳이 없었다. 지금 선댄스가 열리고 있는 파크시티라는 작은 스키타운의 이집션 극장이 첫 상영관이었다. 마침내 1985년, 약 25편의 소규모로 첫 영화제가 막을 올리게 된다.

올해 18회를 맞는 선댄스영화제는 북미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제다. 올해는 특히 하비 웨인스타인이 과거 선댄스영화제에서 성추행했던 사실이 드러난 점을 의식하는 듯했다. 영화제 상영작 라인업에서부터 24시간 폭행이나 추행을 알리는 핫라인 설치까지, 영화제쪽이 예민하게 대비를 하고 있었다. 선댄스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설립자 로버트 레드퍼드는 “이제 남자의 역할은 듣는 것이다”(The role for men, right now, would be to listen)라고 선언했다. “더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들에게 기회를 더 주고, 여성 영화인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 할 때다. 남자들의 역할은 이제 그 소리를 듣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집행위원장 존 쿠퍼 역시 “이제 거대한 변화 속에 있다”라고 답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올해의 영화제 상영작을 보면 약 40%의 영화가 여성감독이나 여성 공동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제 결산을 보면, 영화제의 주요 시상 부문의 감독상은 모두 여성감독 영화에 돌아갔다.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상 <온 허 숄더스>의 알렉산드리아 봄바치, 미국 극영화상 <더 킨더가튼 티처>의 사라 코랑겔로, 월드다큐멘터리 감독상 <셔커스>의 산디 탄, 월드드라마 감독상 <앤 브리드 노멀리>의 이솔드 우그가도티르. 영화제 기간 중 가장 강렬함을 준 영화는 제니퍼 폭스가 연출한 드라마 <더 테일>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성폭행당했던 기억. 그런데 그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등 온전치 않다. 감독은 그 기억을 짜깁기해 이야기를 힘겹게 풀어낸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복받치는 눈물에 나 자신도 놀랐다. 그녀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친근한 얼굴의 그녀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화 속 로라 던이 연기한 다큐멘터리 감독 그 자신. 그녀는 자신을 유대인이라 소개했다. 내가 신학을 전공했다고 했더니, 신기함을 머금은 호기심으로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느새 그녀가 나를 인터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평생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실력은 그대로였다. 아쉽게도 <더 테일>은 이번에 수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강하다는 것을 안다. ‘여자들의 이야기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나이가 들수록 이야기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가는 과정은, 마치 성소에 들어가고 그 제의에 참여하기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과도 같다. 우선 한편의 영화를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고행을 연상시킨다. 선댄스영화제는 그런 면에서 관객을 능동적으로 그 체험에 참여하도록 훈련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이미 거의 모든 영화가 매진 상태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우선 매진된 영화를 보려면 영화제에서 제공하는 스마트폰 앱을 깔아야 한다. 영화 상영 두 시간 전에 열리는 앱에서 웨이팅 리스트를 최대한 빨리 눌러야 한다. 잠시 후 내게 주어진 번호가 나타난다. 시작 30분 전까지 번호를 찾아가서 기다려야 한다. 영화표가 있다고 해도 꼭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여기서는 표가 있는 사람도 일찍부터 줄을 선다. 표에 좌석 번호가 없기 때문에 먼저 가서 기다릴수록 좋은 자리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표가 있어도 거의 한 시간 동안 폭설을 맞으며 밖에서 기다리기도 한다.

폭설 속에서 영화 보기

나는 이번 영화제에서 하루에 적어도 3편, 많게는 5편의 영화를 보았다. 아침에 눈떠서 눈 덮인 마을의 버스 정류장에서 계속 루프처럼 도는 무료버스를 타고 영화관으로 허겁지겁 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행렬, 줄. 드디어 나는 그들 속에 편입되고, 그들과 하나됨을 느끼면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다. 이 작은 마을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적인 영화제. 이곳에서는 한국 감독 혹은 한국 관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참으로 미국적인 색깔이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올해는 장편 경쟁작의 대부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 혹은 뉴스에서 본 이야기에서 시작된 스토리가 많았다. 사적 이야기의 힘. 진실 혹은 사실에서 발단된 이야기의 힘. 그래서 강렬함을 동반하는지 모른다. 동시에 약간 교훈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것이 #MeToo의 목소리이며, 미국 내 흑인의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한국에 도착한 새벽,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뉴스를 들었다. 꽤나 혹독했던, 한강도 얼게 만든 차가운 날씨는 유타의 추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귀를 사로잡은 것은 전날 있었다는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였다. 한국에서도 선댄스영화제뿐 아니라 미국 영화계의 큰 흐름인 ‘#MeToo #TimesUp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결코 숨겨지지 않을 이야기들과 거친 숨소리들이 그렇게 드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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