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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나', 느긋한 이미지를 따라 휘발되는 이야기
이보라 2022-12-14

갓난아기를 데리고 숲속을 서둘러 걷는 나나(해피 살마). 그는 이미 전쟁으로 남편과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부유한 남자와 재혼 후 아이들을 낳고 잘 지내고 있지만 고통스러웠던 피난길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한 악몽으로 되살아나곤 한다. 상류층 집안의 안주인으로 모두에게 선망받는 여자가 되었지만 사실 나나는 어디서든 은밀하게 소외되는 이방인이다. 어느 날, 남편의 방에서 낯선 물건을 발견하고 집배원을 통해 남편을 ‘내 사랑’이라고 칭하는 편지를 접하게 된 나나는 다른 여자의 존재를 직감한다. 그런가 하면 날마다 집으로 고기를 선물해오는 미스터리한 여자 이노(로라 바수키)까지 묘하게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카밀라 안디니 감독의 <나나>는 독립 직후 정치적 격변기에 놓인 인도네시아를 배경으로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고 지속되는지 탐색한다. 나나는 마치 환영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젊은 여자와 이따금 마주치는가 하면, 이노와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가족보다 더 많은 부분을 나누게 된다. 나나가 누구보다 아끼는 막내딸 다이스는 가장 그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는 나나와 주변 여성 인물들의 관계성을 엎치락뒤치락하며 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의 여러 갈래를 상상해보게 한다.

<나나>는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삶이 갖는 미시적이지만 원대한 서사를 궁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데, 이를 특히 머리카락과 관련된 라이트모티프를 통해 반복적으로 구사한다. 나나가 나이 든 남편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감기는 장면, 거울 앞에서 스스로 머리를 빗거나 묶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면서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영화는 또한 나나의 전사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대신 몽환적이고 유장한 장면 구성을 통해 그의 복잡한 심리를 유추하도록 여지를 남긴다. 느릿한 템포로 이어지는 숏들, 다양한 목소리와 악기로 덧입혀진 음악들, 그리고 상대방을 향한 응시나 미세한 시선의 교차 같은 요소들이 나나의 감정을 비밀스럽게 제시한다. 다만 양식에 과하게 집중하느라 서사의 구체적인 부분들은 해소되기보다 휘발되며, 오래전의 많은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어떤 장면들은 포토제니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장편 데뷔작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적 있는 카밀라 안디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유니> 등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영화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촉망받는 젊은 감독 중 한명이다.

<나나>는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했으며, 이노를 연기한 로라 바수키는 최우수조연상인 은곰상을 수상했다.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올림머리 속에 잘 숨겨야 해." 나나가 긴 머리를 풀어헤칠 때는 잠에서 깬 아침이나 긴장을 다 푼 어스름한 저녁때뿐. 늘 머리를 질끈 묶는 그는 어린 딸 다이스에게 주문처럼 타이른다.

CHECK POINT

<현기증>

많은 영화가 그렇듯 <나나> 또한 이 걸작의 중요한 모티프에 빚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나가 이노를 처음 찾아가는 장면은 머리를 올려 묶은 여성이 또 다른 올림머리를 한 여성을 뒤쫓는 으슥한 미행처럼 묘사된다. 희한하게도 <현기증>의 은퇴한 형사 존이 매들린을 따라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현기증>에서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모양의 올림머리와 <나나>에서 “비밀을 품은” 올림머리는 상이한 맥락을 갖지만 이렇게 우연히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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