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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기말의 사랑', 이상하고 독특한 여성들의 다정한 세계
조현나 2024-01-24

21세기가 도래하는 순간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혼란한 와중에도 정직 테크의 경리 영미(이유영)의 짝사랑은 변함이 없다. 같은 회사 직원 도영(노재원)의 횡령을 눈감아주고 금액을 맞추기 위해 부업을 병행하면서도 말이다. 사촌 대신 큰어머니까지 부양하는 상황임에도 영미는 불평 한마디 없다. 1999년 12월31일, 영미가 큰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도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20세기의 마지막 날 두 사람은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미는 도영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공효진)을 상기시킬 만큼 독특한 매력을 지닌 영미의 행보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두 파트로 분리해도 무방할 만큼 영미의 삶은 2000년을 기점으로 극단적으로 변한다. 도영의 범죄를 묵인한 죄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앞에 도영의 부인 유진(임선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전반부는 흑백을, 후반부는 원색을 적극 사용한다. 서사 또한 영미와 가족, 도영을 중심으로 묘사되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 들어선 영미와 유진의 관계로 구심점을 옮긴다. 회삿돈을 횡령한 남자를 두고 얽힌 두 여자의 관계. 출소한 영미는 갈 곳이 없으며 유진은 장애로 인해 혼자서는 거동이 불가능하다. 영화는 치정극의 전개 대신, 결핍을 바탕으로 형성된 둘의 연대를 기반으로 극을 끌고 간다.

<세기말의 사랑>이란 제목은 별명이 ‘세기말’인 영미의 사랑을 가리킨다. 영미가 희생을 자처하며 영화가 시작됐다면 중반부 이후로는 유진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사랑이 영화를 추동하는 자원이 된다. 그러나 <세기말의 사랑>은 두 사람의 합일을 사랑의 완성으로 묘사하는 로맨스물의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도영 모르게 치른 영미의 희생이 이해관계 안에선 설명할 수 없었듯이, 인물들은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어준다. 도영으로 분한 배우 노재원도 눈에 띄지만 영미와 유진의 굴곡을 체화한 배우 이유영, 임선우의 연기는 분기점이라 여겨질 만큼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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