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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패션의 진정성,<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2-12-03

■ Story

최은수(최지우)는 전근 온 첫날부터 학생으로 변장해 자신이 담임을 맡을 학급 아이들의 상황을 파악할 정도로 열의에 넘치는 국어교사. 문제아로 소문난 영희(임수정)는 은수의 관심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반항하고, 은수는 영희에게 부모님을 만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영희의 아버지는 다름아닌 대통령 한민욱(안성기)인 것. 그는 급작스런 암행사찰과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등의 기행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대통령이지만 딸아이 교육만큼은 손놓고 있던 인물. 그는 은수로부터 영희 대신 숙제로 <황조가>를 100번 써오라는 벌을 받지만, 다 써놓은 과제물을 잃어버리고 만다. 은수와 티격태격하는 동안, 상처(喪妻)의 아픔을 갖고 있었던 대통령 한민욱은 순수한 열정을 가진 은수에게 끌리게 되고, 대통령과 여교사 사이의 로맨스는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다.

■ Review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을 그린다는 점에서 <왕과 나>류를 떠올리게 하며, 유명인사와 일반인이 매스컴의 스캔들을 극복하고 씩씩하게 사랑을 이뤄낸다는 점에선 <노팅 힐>을 연상케 하는 영화다. 로맨틱코미디로서 부담없는 모양새를 갖춘 이 영화의 매력이라면, 보통 사람들의 삶과 무관해 보이며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대통령이 평범한 교사와 사랑을 나누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면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망가지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는 게 묘한 대리만족감을 준다는 얘기. 지엄한 대통령이 말썽꾸러기 딸 대신 <황조가>를 100번 적었다가 이를 한강에 빠뜨렸다고 변명해대거나, 교육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황조가>의 ‘지’자가 ‘갈 지’인지 ‘땅 지’를 묻는 장면을 보며 통쾌한 웃음을 짓지 않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일개 교사 앞에서 설설 기게 되는 상황의 저변에는 일종의 권력관계가 놓여 있다. ‘군사부일체’라는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딸의 담임교사 앞에선 대통령 아니라 그보다 높은 권력자라도 허리를 굽혀야 한다는 한국적 상황은 권력관계의 역전을 가져온다. 자연, 만인 앞에서 당당한 대통령이 일개 천방지축 교사에게 쩔쩔매는 모습은 권위주의적 대통령상이 익숙한 우리에게 웃음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민욱이 은수에게 “그냥 민욱씨, 아니 영희 아빠라고 부르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관계의 아이러니를 잘 드러내준다.

이들의 사랑은 이 뒤집어진 권력관계와 얼마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민욱은 대통령인 자신에게도 당돌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여교사가 귀엽고, 은수는 자신 앞에서만큼은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최고 권위자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둘의 사랑은 상식적인 룰을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일궈나갈 로맨스의 전조는 영화 시작 부분부터 보여진다. 민욱과 은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둘의 기질적 공통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지하도에서 노숙자로 변장하고 민생시찰을 벌이는 민욱의 모습은 전근 온 첫날 학생 차림으로 교실에 들어가 학급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은수의 깻잎머리와 별 차이가 없다. 영화는 닮은꼴인 남녀가 서서히 마음을 열고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비교적 무리없이 그린다. 절제된 표현과 느리지 않은 호흡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사람의 사랑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잘 나가던 로맨틱코미디의 흐름은 엉뚱한 지점에서 가로막히곤 한다. 영희의 남자친구나 은수의 성전환자 동거인 등 양념이라 할 만한 캐릭터로 초점이 옮아가는 순간, 영화는 기존의 호흡을 잃고 오버하며 어수선해진다. 또 은수가 민욱에게 뜬금없이 <모정>의 주제가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거나 비서진이 호텔에서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지나치게 작위적인(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상식적인 상상력의) 상황설정과 일부 주연급 연기자의 어색한 연기도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부분.

어떻게 보더라도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세련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가 호소하는 감성은 주로 고전적이거나, 때때로는 복고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의 유머 또한 신세대들에게는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비자극적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른다. 이 착한 사람들의 동화 같은 이야기는 상대방이 유치하다고 받아들일까봐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따위의 말을 쉽사리 입에서 꺼내지 않는 모던한 감성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올드 패션 감각이 영화의 진정성까지 상쇄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경력에 흠집을 줄까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은수나, 떠나간 사랑을 붙잡기 위해 자신의 위선을 국민 앞에서 고백하는 민욱의 태도는 구태의연할지언정 단번에 무시해버리긴 힘들다.

(왼쪽부터 차례로)♣ 은수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던 영희를 다른 학생과 똑같이 대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사소한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대통령 한민욱은 은수의 열의에 감복한다.♣ 한민욱은 암행 사찰을 다니고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등 특이한 대통령이다. 영희의 숙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도중, 은수와 인욱의 관계는 서서히 가까워진다.

이 영화의 개봉 시기를 결정하는 데 국민적 관심사인 대통령선거가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이 시끌벅적한 정치행사에 관심을 쏟는 이들보다는 쌀쌀한 연말을 맞아 마음 한구석에 조그마한 모닥불을 피우고자 하는 관객에게 더 어울리는 영화다. 문석 ssoo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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