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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단편 옴니버스영화, 좀비처럼 걸어봐!
김현정 2004-03-16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그들은 차라리 죽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시체 ‘좀비’가 되어 남루한 일상을 하루하루 연명해간다.

<만번의 긍정> <울리불리 다이어트> <슬픈 크리스마스 푸딩> <몰락취미를 꿈꾸다>

<좀비처럼 걸어봐!>는 전방위 문화게릴라를 자처하는 창작집단 파적필름이 제작한 디지털 단편옴니버스영화다. 네명의 감독이 슬픔을 주제로 만든 이 영화는 좀비처럼 휘적휘적 걷는 한 남자의 그림자로 영화를 연결하고 있다. 첫 번째 <만번의 긍정>은 헤어진 연인에게 집착하는 한 남자의 파괴적인 행동을 뒤쫓는다. 김설우 감독은 붓으로 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휘청이는 카메라로 상실을 인정할 수 없는 남자를 담아냈다. 세월이 흐르고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도, 그는 영원히 죽어버린 자신의 한 부분을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슬픔으로 무거워진 화면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으로, 꿈처럼 느린 속도로 흘러가는 마지막까지, 짧은 시간 안에 변화하는 호흡이 인상적이다.

두 번째 <울리불리 다이어트>는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자가 다이어트 컨설턴트로 변신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여자는 첫 번째 고객을 맞지만, 그의 다이어트를 위해 사용해선 안 되는 방법까지 동원한다. “비만은 21세기의 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끝없이 울려퍼지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얻었어도 잃어버린 한 덩어리의 살 때문에 방황하는 여자를 섬뜩하게 응시한다. “30kg의 나는 어디 갔지?”라고 독백하는 여자는 바짝 마른 좀비처럼 고정되어버렸다. 뚱뚱하다는 사실이 이 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풀이해 듣다보면, 초반의 평범한 스타일마저도 악몽처럼 느껴지는 영화.

<슬픈 크리스마스 푸딩>은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사자성어>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잘 알려진 김정구 감독의 영화다. 조용한 거실, 공들여 단장한 한 여자가 음식접시로 가득한 식탁을 마주하고 있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그의 성기, 그의 심장,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 그의 내장과 살코기를 끈질기게 씹어먹고, 그의 피를 잔에 담에 마신다. 그를 영원히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슬픈 크리스마스 푸딩>은 극단적인 내용과 달리 단정하고 절제된 형식을 유지한다. 잠시 슬픔이 터져나오는 순간도 있지만, 여자는 금세 머리를 매만지고 식사를 계속한다. 실연이 슬픔의 보편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는 감독은 좀비처럼 텅 빈 눈동자로 춤을 추는 여자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잡아내면서 아무리 채워넣어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을 보여준다.

마지막 <몰락취미를 꿈꾸다>는 네편 중 가장 난해할 것이다. 실망과 좌절을 거듭하던 한 여자 화가는 죽음을 형상화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 자신마저 죽음에 이른다. 방을 가득 메운 그로테스크한 그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쭈그려 앉은 화가의 멍한 표정, “피투성이 세계지도를 입에 담은 듯한” 하얀 마네킹이 충격적인 영화. 그러나 화가가 사라지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담은 조용한 마지막이 어떤 강렬한 화면보다도 진한 슬픔을 남기는 영화다. <좀비처럼 걸어봐!>는 싸고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디지털영화에서 활로를 찾고 있는 독립영화계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물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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