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가볍고 상쾌, 살짝 여운까지 있는 와인 같은 영화, <사이드웨이>
이종도 2005-02-15

바람 잔뜩 든 철부지 남자들이여, 와인 시음 여행 다녀와 철도 들고 사랑도 얻으라.

남자들 머릿속엔 퇴행적 욕구가 잠복해 있다. 머리가 굵어지면 그 퇴행욕구를 세련되게 위장하고 퇴행을 미화한다. 술을 마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릴 적 구강기에 대한 강한 아쉬움 때문이다.

술병 주둥이는 어른 남자에게는 엄마의 젖꼭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같은 술이라도 와인은 다른 대접을 받는다. 와인엔 그런 퇴행 욕구를 덮을 만한 두터운 문화적 휘장이 있다. 오랜 역사, 다양한 품종은 섬세한 취향을 요구하고 이 취향은 어른스러운 것으로 인정된다. 물론 이 취향을 위해선 많은 돈이 든다.

결혼을 앞둔 일주일 동안 와이너리(포도주를 만드는 농가)를 돌아다니며 마지막 자유를 누려보겠다는 잭(토머스 헤이든 처치)과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러 나선 마일즈(폴 지아매티)의 여행 이야기는 사실 귀가 솔깃해질 내용은 아니다.

“우리 나이에 돈, 능력 없으면 도축장 끌려가는 소”라고 느끼는 중년 남자 둘이 길을 떠난다는 내용만 들으면 벌써 이런 감탄사가 절로 떠오른다. 꽤나 지루하겠군. 고급스런 와인 취향에서 속물 냄새까지 맡는다면 이건 최악이다.

미국의 비평가들이 모두 엄지손가락 두개를 들어올리며 상을 받았다는 얘기엔, 캘리포니아 와인협회가 혹시 와인을 상자째 돌린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음모론까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두 남자가 재수없는 돈만 많은 남자들이 아니라는 점. 못생기고 잘 나가지도 못하는데 무척 사랑스럽다. 그들이 택한 길은 캘리포니아, 하고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포도밭들이다. 게다가 사랑도 이루어진다. 이런 즐거운 판타지가 있나.

와인을 좋아한다면 입맛을 더 다시게 될 것이다. 흔히 남자들이 길을 떠날 때 품게 마련인 성적인 환상(느닷없이 퀸카가 나타나 자신을 덮칠 거라는)까지 더해진다면 더 좋다. 와인의 맛을 결정하게 마련인 테루아(terroir: 와인의 환경)와 거친 자연의 시련을 떠올리며 인생을 와인에 비유하는 사람이라면 영화에 더욱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피노, 카베르네 소비뇽, 리슬링 등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포도 품종이 영화 속의 캐릭터를 암시할 때면 키득거리며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일렉션> <어바웃 슈미트> 등을 만든 알렉산더 페인답게 폐인스러운(또는 루저스러운) 남자들이 등장한다. 우리의 주인공 마일즈는 <일렉션>의 매튜 브로데릭만큼이나 답답하고 소심하며 <어바웃 슈미트>의 잭 니콜슨만큼이나 일이 잘 안 풀린다. 교사가 아니라 작가로 성공하고 싶지만 책을 출판해주겠다는 곳이 없다. 아내는 2년 전 떠나고 빈자리는 우울증 약과 빈 와인병이 채웠다. 익숙한 먹물형 주인공이다. 그의 꼬인 인생을 풀어주는 계기를 주는 이가 있으니 결혼을 앞둔 친구 잭이다. 잭이 마일즈에게 내리는 처방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우울증 약도 끊어.” “섹스 부족이야.” “여자가 꼬리치는데 내빼?” 세제 광고류의 광고 모델로 근근이 배우 자리를 유지하는 처지가 마일즈보다 나을 리는 없지만 그는 캘리포니아 햇살을 만끽할 줄 아는 낙천주의자다.

이들이 길 위에서 만난 여자 둘은 이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현명하다. 마야(버지니아 매드센)는 늙고 수줍음 많은 소설가 지망생 마일즈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스테파니(샌드라 오)는 자기 집에 두 남자와 마야를 함께 초대해 인연을 엮어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풍요로운 햇살과 태평양에서 부는 바람으로 성숙해진 와인은 네명의 남녀를 맺어주는 놀라운 사랑의 묘약 노릇을 한다. 뿐만 아니라 인생과 사랑의 미묘함을 비유하며 영화의 향을 한층 복잡하고 감미롭게 한다.

마야가 마일즈에게 묻는다. 왜 피노를 좋아하냐고. 마일즈는 피노가 재배하기 힘들고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는 어려운 품종이지만 그래서 맛이 더 오묘하다고 답한다. 마야는 마일즈의 섬세한 취향을 존중하며 은근히 사랑의 눈빛을 보내고, 마일즈는 피노 키우듯 사랑을 소중하게 키워나갈 것이라고 에둘러서 답하는 것이다.

너무 진지해서 따분하다고? 아니다. 영화는 그때 잭과 스테파니가 침대 삐걱거리게 하기 게임을 하면서 내는 재미있는 배경음을 들려준다. 묵직하고 중후한 레드와인쪽보다는 가볍고 상쾌하며 살짝 여운까지 있는 화이트와인쪽에 가까운 작품이다.

<사이드웨이>에 등장하는 와인들

사람과 와인은 오래될 수록 좋다

마야의 입을 빌리면 너무 오래돼 힘이 떨어지기 직전의 와인이 가장 아름답다. 영화는 마치 무르익은 중년의 삶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듯하다. 페인 감독은 장면과 성격에 맞게 와인을 직접 골라 플롯 안으로 와인향이 스며들게 했다.

마일즈와 잭의 여행은 피노 누아로 만든 1992년산 샴페인으로 시작한다.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부푼 마음을 샴페인 거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들른 샌포드 와이너리에서 마일즈는 뱅 그리를 마시며 잭에게 시트러스, 딸기, 아스파라거스와 치즈향이 난다고 말한다. 마일즈가 얼마나 예민하며 뛰어난 표현력의 소유자인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좋은 와인만 만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마일즈는 프래스 캐년에서 맛본 와인에 대해 구강세척제 같다, 버스 매연 맛이다라고 가차없는 평가를 내리는데 이런 와인 맛은 마일즈와 잭이 여행 중에 맛보게 될 고난을 비유한다. 네명의 주인공 남녀가 우아하게 레스토랑에 앉아 먹는 밝고 환한 색상의 소비뇽 블랑은 가슴 설레는 중년 남녀의 얼굴과 교차하며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무르익을 것인가를 예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와인을 합해도 단 한병의 와인에 미치지 못한다. 마일즈가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와인이 그 주인공으로 주인공만큼 나이를 먹은 1961년산 슈발 블랑이다.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을 대표하는 초특급 와인으로 흰 말이란 뜻이다.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보르도의 와인 가운데서도 샤토 마고 등과 더불어 8대 와인으로 꼽힌다. 슈발 블랑을 만드는 주품종은 보르도 와인의 주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이 아니라 늘 조연 자리에 머무는 카베르네 프랑크다. 생의 변방에서 조연 자리에 머물고 있지만 나름의 깊고 진한 향을 풍기며 사는 중년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과연 마일즈는 두고두고 아낀 이 와인을 언제, 누구와 마시게 될까? 이 질문은 마일즈와 마야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과 같은 뜻이기도 하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