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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이지 않는 팜므파탈, <위험한 관계>

치명적이지 않는 팜므파탈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싱겁다.

자본주의 사회와 상품화된 여성간의 상관성을 들먹거리는 것은 상투적일 뿐이다. 여성이 남성의 취향에 맞춰 자신의 몸과 욕망을 길들이는 것조차 상품 가치를 높이는 일로서 취급되는 것이 물신화된 사회의 특징이 아닌가. 남성 담론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본다는 것, 즉 은닉된 남성의 눈을 경유하지 않은 시선을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여성의 자아 찾기란 시력의 회복이다.

제임스 토벅의 <위험한 관계>는 프랑스 혁명 직전의 부르주아 사회의 풍속도를 담은 <위험한 관계>와 동명의 제목을 지녔지만, 거액이 오가는 하룻밤의 정사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은밀한 유혹>을 연상시킨다. <은밀한 유혹>이 여성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음란한 게임을 엉뚱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했다면, <위험한 관계>는 여성을 상품화하는 남성에 대한 처벌과 여성의 자아 발견을 맞물리게 하려는 의욕을 보인다. 물론 그 의욕이 허망한 제스처를 낳을 뿐이지만.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베라(니브 캠벨)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시험하고, 타자로부터 이를 확인받음으로써 만족을 얻는 ‘덜 주체화된’ 여성이다. 그녀의 연인인 포드(프레드 웰러)는 여성을 미끼로 영화 제작자 자리를 얻는 일에 골몰하는 철없는 남성으로, 그에게 여성은 성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 둘의 관계에 이탈리아 방송 산업의 거물인 토마소(도미닉 치아니즈)가 개입하고, 베라에게 매혹된 그가 포드에게 베라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대가로 10만달러를 제안하면서 게임이 시작된다. 물질적, 성적 욕망을 위해 여성을 수단화하는 포드와 토마소는 베라가 욕망의 제물이기를 바라지만, 그 욕망의 거미줄에 걸려드는 것은 베라가 아닌 그들 자신이다. 오히려 베라는 이를 계기로 덩치 큰 소녀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여성으로 탈바꿈한다.

<위험한 관계>는 고전 누아르에서 위협적인 섹슈얼리티의 대가로 처벌받았던 팜므파탈과 남성의 관계를 역전시키고, 남성간의 교환 대상이던 여성이 시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야심만큼이나 아쉬움을 남긴다. 니브 캠벨에게서 <와일드 씽>에서와 같은 매력을 기대했겠지만, 베라에게서 팜므파탈 특유의 ‘치명적 매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음모와 배신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면서도 인물들이 맺는 관계의 그물망이 촘촘하지 못한 탓에 속고 속이는 인물들의 심리가 그 헐렁한 틈새로 빠져나가고, 베라와 남성들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생략되어 관계의 역전에서 오는 쾌감도 힘을 잃는다. 베라의 변화가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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