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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너는 내 운명>
이종도 2005-09-20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사랑이 변한다고 믿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너는 내 운명>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가 던진, 사랑은 변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둘의 믿음은 한결같고 전혀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극중 은하의 말투를 흉내내서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까.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고? 진정? 그런데 박진표 감독은 허진호 감독의 맞은편에서 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은수가 볼 수 없는 지점에서 답한다. 사랑이란 두 개인 사이의 일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사는 두 개인 사이의 일이라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지점이고 입장이다.

목장에서 젖소를 키우는 석중(황정민)은 은하(전도연)만 좋아하는 순정의 남자다. 은하를 쉬게 하기 위해 티켓을 끊고, 아예 커피까지 타준다. 정말 쉬게 해주겠다는 거다. 진정? 진정 그렇다. 석중은 남자들 무의식 깊숙이 잠복해 있는 순정을 호명한다. 그러나 감독은 예리하게 그 순정의 한계를 사회적인 문맥 속에 위치시킨다. 석중은 나이 지긋해서도 스스로를 위해야만 하는(어머니 나문희에게 들키고 말지만) 외로운 총각이며, 그것도 결혼하러 필리핀까지 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농촌 총각인 것이다. 그 순정은 개인적인 순수함에서 그치고 말 일이 결코 아니다.

백마 탄 성의 기사가 변두리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는 전형성이 이 작품에서는 뒤집혀 있다. 서울에서 흘러 내려온 여자가 시골의 남자를 선택한다. 남자가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선택권과 결정권을 갖고 있는 이는 당연히 서울에서 내려온, 닳고닳은 은하다. 어쩌면 석중의 순정은 달리 방도가 없는, 구석으로 내몰린 자가 마지막으로 지키고 싶은 자존심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

역전된 연애의 관계가 영화의 주제지만 그걸 둘러싼 그림은 변두리의 풍속화다. 그것도 우리 시대의 가장 먼 변두리로 밀려난 농촌의 풍속화다. 봄밤의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서정을 깔고는 있되, 세밀한 리얼리티에 기대어 그린 사실주의 화풍이다.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사랑의 진정성을 놀라운 이미지의 힘으로 길어올린다는 데 있다. 비루한 현실을 실사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진창 속에서조차도 꿈틀대는 사랑의 강인함을 한 터럭도 유실하지 않은 채 건져낸다. 운명을 바꾸는 것은 힘들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변할 수 없다고 답하는 자세는 눈물겹다. 정직하면서도 할말은 다 하고, 그 앞뒤를 솜씨있게 손질까지 해내는 데 믿음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봄날은…>의 은수의 침묵도 옳은 답이지만, 은하와 석중의 답은 한층 더 사려깊은 답이라고 느껴진다.

그 답은 은하와 석중의 사랑을 경유하여, 개인의 사랑에 대해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까지 이른다. 에이즈에 걸린 은하, 그리고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석중에 대해 사회는 완강하게 차단막을 내린다. 은하와 석중은 운명과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판정내린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온몸으로 그 차단막을 돌파한다. 그들의 순정은 가슴 아프지만, 종내는 통쾌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순정이라는, 이제 사어가 되어버린 듯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감동적으로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황정민과 전도연의 연기의 질감이 그 믿음을 더 굳세게 만든다. 그들의 입맞춤에선 고단한 현실의 냄새와 그걸 딛고 일어서려는 이들의 땀 냄새가 난다. 어머니 역의 나문희부터 콜레라에 걸려 파묻힌(촬영 뒤엔 구출되지만) 돼지들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변두리의 삶을 최대한 근사치로 표현해낸다. 나문희는 구부정한 걸음걸이만으로도 현실의 무게를 가늠하게 한다. 주연배우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탓인지, 연기파 조연배우들이 왜소해 보인다는 점은 아쉽다.

시골 다방 간판처럼 순정은 퇴색해버린 말이지만, 이 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파이란> 못지않게 진실한 사랑이 존재함을 증언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순정에 관해 돌아보게 만든다.

은하가 퇴원 뒤에 조촐한 평상 소주 파티에서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를 때, 석중 어머니가 면회실에서 은하를 만날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하와 석중이 면회실에서 힘겨운 재회를 할 때 그렇다. 면회실 아크릴 벽에 댄, 황정민의 예민하고 고운 기다란 손가락이, 목장에서 험한 일을 하는 사람의 손가락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사소함이 감동의 크기를 줄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손은 거짓말 못하는 순정의 손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극장에 들어간 자라면, 열에 열은 분명 개종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며, 사랑은 움직이는 거라고 믿는 종교에서 단 한 사람의 연인만을 섬기는 종교로 말이다. 이 영화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뭇 사람의 가슴속에 잠복해 있는 순정을 이끌어내고, 또 그들로 하여금 순정이 실체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 개종의 요구 앞에선 한치도 머뭇거려서는 안 될 것 같다. 재빨리 엎드려 개종을 하고 한 사람만을 섬기겠다고 선서하거나, 뻔뻔하게도 사랑엔 여러 얼굴이 있음을 주장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할 것이다. 대답을 하는데 지체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순정은 의심받기 충분할 테니까. 그러나 영화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사사로운 사랑의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따돌림과 죽음 앞에서도 사랑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자신을 걱정해주던 벗들과 형제자매와 부모가 부당한 이유로 등을 돌릴 수 있는 곳에서조차, 사랑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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