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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바라본 21세기의 동경이야기, <카페 뤼미에르>
홍성남(평론가) 2005-10-18

허우샤오시엔의 1995년작 <호남호녀>의 도입부에서 영화배우 일을 하는 여주인공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1949)이었다. 허우는 자기에게 일종의 도전 의식을 불러오는 영화감독이라는 표현으로 오즈를 평가하곤 했다. 그러니 그 장면이 오즈에 대한 공경의 표시를 담고 있음을 알아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카페 뤼미에르>는 그런 공경의 마음이 아예 온전한 출발점이 되어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오즈의 영화들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했던 표준 비율의 쇼치쿠 영화사 로고 숏에 이어 마치 <동경이야기>(1953)의 도입부를 떠올리게 하는 듯 기차가 지나가는 숏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쯤 되면 성급한 관객은 이제 오즈의 세계에서 가져온 스토리와 스타일을 스크린에 펼쳐놓는 영화가 진행되겠구나, 라는 예상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금방 기대의 배반을 맛보고 말 것이다.

분명히 오즈의 세계에서 준거점을 찾을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을 배치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이를테면, 요코가 자기 집을 찾아온 아버지에게 대접하려 이웃에게서 사케를 빌리는 행위는 <동경이야기>의 노리코가 이미 했던 것의 반복이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허우가 시도한 것은 수오 마사유키의 <변태가족, 형의 색시>(1984) 같은 오즈의 우스꽝스런 패러디는 물론 아니고 나가오 나오키의 <잔물결>(2002) 같은 극히 표면적인 이해에 기반한 오즈의 무미한 계승도 아니다. 허우는 오즈를 단순히 복제하거나 모방함으로써가 아니라 오즈의 정신과 적극적으로 교감함으로써 오즈와 만나려 한다. 허우에게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일본사회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는 오즈의 것과는 다른, 멀찍이서 시간을 두고 오래 바라보는 자기 식의 시선을 굳이 폐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무엇에 대해 유독 강한 호기심을 느끼는 듯한 어떤 때에는 그는 자기라는 관찰자가 이방의 존재임도 숨기지 않는다. <카페 뤼미에르>는 예민한 이방인 관찰자 허우가 바로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21세기의 ‘동경이야기’라고 부름직한 영화인 것이다.

허우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는 젊은 여성 요코(히토토 요)의 발걸음들을 따라가면서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며 식사를 하는 등의 그녀가 하는 행동들이란 게 워낙에 극적인 가치를 거의 갖고 있지 않은 듯 사소한 것들인지라, 이것은 <오즈의 반(反)영화>라는 책에서 요시다 요시시게가 오즈의 영화에 대해 쓴, 드라마가 아니라 자잘한 사건들에 대한 영화라는 표현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카페 뤼미에르>는 스토리의 형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듯한 영화인데, 그래도 여기에 흐릿하나마 이야기의 전개 행로라는 게 있다면 그 중요한 하나는 요코와 그녀 가족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녀는 대만인 남자친구의 애를 가졌지만 가족의 생각과는 달리 그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애를 낳아 키울 생각이다. 홀로 선다는 것의 가치를 대변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젊은 여성들이 가족의 뜻을 존중해 결혼을 받아들였던 오즈 영화 속의 시대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 되어버렸음을 인식한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허우의 예민한 감각은 지나간 시간이 모두 증발해버린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요코가 순간 과거의 침윤을 경험할 때처럼 과거는 현재로 경계를 넘어올 수 있는 것이고 전철의 소음을 기록하는 하지메(아사노 다다노부)가 그런 자기의 행위가 훗날 무언가의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처럼 현재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구획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며 젖어듦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을 <카페 뤼미에르>는 어떤 도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흘러가는 삶 속에서 포착해낸다.

<카페 뤼미에르>의 저류를 지나가는 또 다른 이야기의 행로는 요코의 조사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과거의 음악가 장웬예(江文也)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다. 그래서 요코는 그가 예전에 자주 다녔다던 서점과 카페를 찾아가고 그의 부인을 만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럼으로써 그녀가 자기 주위의 세계와 접촉을 갖는다는 점이다. 종종 점유 공간 그 너머를 암시하는 창문과 함께 포착되는 구도가 시각화하는 것처럼 그녀는 실내에 있으면서도 바깥으로 나갈 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그녀는(틈만 나면 전철의 소리들을 녹음기에 담는 하지메와 함께) 호기심어린 관찰자 허우의 훌륭한 대리인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대리인(들)을 통해 허우가 동시대 일본에서 발견해낸 흥미로운 대상이 바로 전철이다. 영화 속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전차는 우선적으로는 요코의 공간적 이동을 가능케 하는, 그래서 세계와의 접촉을 용이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고유한 존재의미를 갖는 접촉의 대상 혹은 ‘세계’라고까지 말해도 될 것만 같다.

전작인 <밀레니엄 맘보>(2001)의 한 장면에서 허우는 일본에 간 비키가 여관에 머물 때 창밖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통해 정체된 그녀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줬었다. 어쩌면 <카페 뤼미에르>의 허우는 그로부터 더 나아가서 전차를 통해 시간이란 보이지 않는 대상, 그 보이지 않는 흘러감을 애써 시각화하려는지도 모른다. 특정한 종착지 없이 달려가는 전차 안에서 요코가 말없이 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이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의 변형처럼 보인다. 내내 전차와 함께 삶의 그런 광경들을 바라봤던 영화가 전철 주변과 안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듯싶다. 약 7분여 정도 대사없이 그렇다고 극적인 행동도 없이 전달되는 영화의 이 마지막 시퀀스는 이상한 흥분과 긴장감을 안겨준다. 그건 여기서 허우가 단절과 지속을 미묘하게 이용하는 방법론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통과한다는 것이 놀랍게도 사건과 스펙터클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카페 뤼미에르>의 허우는, 삶의 흘러감을 영화들에 그려냈던 오즈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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