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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신사의 재조명, <안녕, 사요나라>

“시민들이 군대비용을 치르게 하자. 우리가 사지로 내모는 아들들을 위한 비용을 그 아버지들이 치르게 하자. 우리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고? 그렇다면 왕권신수설을 만들어내자. 우리의 군인들이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죽는지를 모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왕실숭배사상을 만들어내자.”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국가가 내세우는 전쟁의 논리를 이처럼 사뭇 신랄하고 냉소적인 어조로 꼬집은 바 있다. 일제에 의해 ‘대동아 성전(聖戰)’으로까지 미화되었던 태평양전쟁의 기반, 즉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 천황제를 수립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기치하에 일본 국민들과 식민지인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내세웠던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실체는 슈니츨러식의 비아냥거림만으로도 충분히 무너져내릴 만큼 시대착오적이고 엉성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아 그 성긴 틈새를 채워넣고 이데올로기를 단단하게 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일본인들- 사지로 내몰린 아들들과 그 비용을 댄 부모들- 자신이었다. 이제 과거 일제로부터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이나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작업은 비단 황실이나 정부가 아니라 일본이라고 하는 민족-국가의 내셔널리티와의 싸움이 된다. 그렇기에 <안녕, 사요나라>에 삽입된, “총리나 각료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내셔널 폴리틱스, 즉 국가 그 자체를 성립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위”라는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의 지적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것이다.

김태일과 가토 구미코의 <안녕, 사요나라>는 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분명 간파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끌려나가 전사한 부친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合祀)- 신사와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죽은 사람들 여럿의 혼을 한데 모아 제사지내는 것-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합사취하운동을 벌여온 이희자씨의 삶을 추적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녀의 투쟁에 호응하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일본 우익 인사들의 주장까지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쟁의 피해자들이 있었으며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쉬이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대다수 일본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그녀의 힘겨운 투쟁이 그저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이희자씨를 처음 만난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군인들과 관련된 재판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일본인 후루카와 마사키는 <안녕, 사요나라>를 이끄는 또 하나의 축이다. 그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의 본질이 “전쟁의 희생자들을 통해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로 미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기만적인 의식이 중단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가 이희자씨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냈는가를 깨닫게 된 과정이 내레이션으로 들려오는 한편, 야스쿠니신사 참배반대 및 합사거부 운동 등의 현재적 실천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된다.

일본 내 진보진영 및 우익 각계인사들과의 인터뷰, 일본 고유의 민족종교인 신도(神道)와 거기에 수반되는 신사참배 및 마쓰리 등의 의식이 일본인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한 설명 등은 <안녕, 사요나라>가 단순한 인물다큐멘터리에 머물지 않게끔 적절한 정보와 분석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안녕, 사요나라>가 한국의 비디오 액티비스트들의 작업에 종종 수반되곤 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별다른 차별성이 없다’는 비판을 피해나가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정치적 의의는 있지만 미학적 중요성은 없다’는 진부한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이희자씨가 아버지의 비명(碑銘) 없는 무덤에 바치는 헌화, 그녀가 과거 일본군 병원 터에서 아버지에게 올리는 제사, 그리고 일본군에 학살된 중국인들의 유골이 전시된 박물관에서 속죄의 기도를 올리는 후루카와의 모습 등은 <안녕, 사요나라>에서 매우 중요한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장면들이 점점 강조될수록 앞서 언급한 ‘불안감’은 좀더 탈개인적인 컨텍스트 내에서 정치적 힘으로 전화될 기회를 얻는 대신 개인적 위령(慰靈)- 사실 위령이란 죽은 이들과 관련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허락된 유일하고도 숭고한 자기애이다- 의 언저리만을 맴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다큐멘터리에 담겨질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따뜻함을 지니고 접근하는 연출자 김태일의 태도는 분명 존중할 만하지만, 그의 작업이 텔레비전 <인간극장>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동지가 아닌) 연출자로서의 냉정함이 필요하다. 그가 냉정함 없이 동지로서만 남을 때, 그의 작품은 <길동무>(2004)와 같은 자족적 기록물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녕, 사요나라>는 <길동무>의 실패를 반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태일의 첫 번째 영화 <원진별곡>(1993) ‘다음’ 혹은 ‘너머’의 작업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작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작품에 대한 욕심’으로서의 냉정함은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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