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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남자들의 사과, <모두들, 괜찮아요?>
김혜리 2006-03-29

“남들이 보고 있지만 않다면 몰래 내다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기타노 다케시 감독만은 아니다. 백수생활 10년째인 남편과 치매를 앓는 아버지, 애어른 아들을 부양하고 보살펴야 하는 민경(김호정)도 그의 견해에 백번 동의할 것이다. 그녀의 남편 상훈(김유석)은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와 10년째 감독 지망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 “나는 거짓말쟁이지만 성실한 인간”이라고 상훈은 독백하지만, 진정 성실한 사람은 남편의 꿈을 위해 촉망받던 발레리나 시절을 접고 그악스런 학원 원장으로 전신한 민경이다. 한편, 왕년의 바람둥이 행각으로 복잡한 가정사를 민경의 어깨에 얹어준 아버지 원조는 시도때도 없이 집을 나가 딸의 심장을 내려앉힌다. 그러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딸만은 언제나 제대로 알아보고 “공주야!”라고 부르는 아버지를 민경은 외면할 수 없다. 하지만 갈등과 해소를 반복하며 그럭저럭 유지되던 상훈과 민경의 관계에도 위기가 닥친다. 상훈의 바람기에서 비롯된 다툼이 민경이 상훈을 내치는 사태로 비화된 것이다.

이야기에서 형식까지 <모두들, 괜찮아요?>에는 꾸민 구석이 없다. 현실의 가족이 사는 모습이 그렇듯 비극으로도 희극으로도 한달음에 치닫지 않는다. 애틋하게 보듬다가도 상처가 덧나고,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긋다가도 측은지심이 치솟는 과정이 가계부처럼 한장 한장 펼쳐진다. 감독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선택한 영화의 장점은 에피소드의 구체성에서 발휘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준비 작업에 질린 상훈은 급기야 포스트잇을 1.85:1 비율로 자르며 “영화는 영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평소처럼 능글대며 아내를 응대하던 상훈은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1년만 더 기다려줘”라는 무거운 청을 토해놓는다. 같은 동전의 이면이지만 <모두들, 괜찮아요?>는 선택하고 생략하고 암시하는 화술의 기교에 무심하다. 영화의 정서적 중심은 민경인데 행동의 중심과 화자는 상훈이고 러닝타임이 상당히 지날 때까지 관객이 애착할 만한 인물을 찾기 힘든 것도 약점이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두들, 괜찮아요?>는 무능한 남자들의 사과다. 과거 멋쟁이 한량이었으나 지금은 초라해진 장인 원조는, 예술을 핑계로 아내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는 상훈의 다른 얼굴이며 심지어 면죄부다. 잠깐 머리가 맑아진 원조가 “요즘 내가 정신이 흐릿하니, 민경이를 자네한테 부탁한다”고 상훈에게 말하는 장면은 이 남자들의 자존심이 “민경을 돌보고 있다”는 허위의식으로 지탱된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흥미롭다. 이상하게도 감독은 민경이 감당하는 ‘착취’를 누구보다 가슴아파하면서도 “잘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로 너무 쉬운 화해를 종용하며 남자들-스스로를 슬쩍 용서해 버린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요컨대 이것이 <모두들, 괜찮아요?>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자전적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는 제작준비 단계에서 오랫동안 <영화감독이 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불렸다.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김유석이 분한 상훈은 늦깎이 데뷔를 한 남선호 감독의 분신이다. <장만옥의 이마베프> <프랑스 중위의 여인> 등이 영화 촬영 과정을 소재로 삼은 ‘영화에 관한 영화’라면 <모두들, 괜찮아요?>는 영화 현장에 입성하기까지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에 관한 영화’인 셈이다. 실제로 상훈 역의 김유석은 “속옷만 빼고” 감독의 옷가지를 빌려 입었고 민경 역의 김호정은 감독 부인이 운영하는 무용학원을 찾아 대사를 따왔다고 한다. 공과금 독촉장 같은 소품의 출처도 감독이었다는 후문이다.

이순재의 귀환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이순재가 특별출연한 <물망초>(1987) 이후 18년 만에 세편의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귀환했다. 촬영은 <모두들, 괜찮아요?>가 먼저였으나 개봉은 <파랑주의보> <음란서생>이 빨랐다. 오랜만에 충무로로 돌아온 노장 이순재는 “과거에는 스타들 때문에 기다렸는데 요즘 한국영화는 좋은 한컷을 위해 시간을 들이더라”는 격세지감을 털어놓았다. 그는 과거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포스터 촬영을 위해서 경사진 벽에 몇 시간씩 매달려 있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모두들, 괜찮아요?>에는 이순재와 연극,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배우 여운계가 부인으로 우정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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